[세상을 보며] ‘고향의 봄’ 100주년을 앞두고- 김진호(정치부 부국장대우)

기사입력 : 2025-03-10 19:26:43

“영원히 지속되는 겨울은 없고, 차례를 건너뛰는 봄도 없다”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할 볼랜드(1900~1978)의 말은 참으로 맞는다.

요란스럽게 순서를 거스르려고 하는 인간 세상을 나무라듯이 봄이 꽃향기를 품고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국민 애창곡 ‘고향의 봄’은 꽃의 도시 창원(마산)에서 탄생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마산에 살던 이원수(1912~1981) 선생은 열여섯 살에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1923년 창간한 잡지 ‘어린이’ 4월호에 동시 ‘고향의 봄’을 투고해 당선됐다.

이후 바이올린 연주자 홍난파 음악가의 작곡으로 동요 ‘고향의 봄’이 만들어져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이원수 선생은 1912년 양산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째에 현재 창원 소답동으로 이사를 했다. ‘고향의 봄’은 어릴 때 뛰어놀았던 마을의 가장 큰 집인 우리나라 현대 조각의 개척자 김종영(1915~1982) 선생의 생가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과 동네의 정경 등을 담았다.

‘고향의 봄’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동시 ‘오빠생각’ 영향이 크다.

당시 수원에 사는 열한 살 소녀 최순애(1914~1998)가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그리며 ‘오빠 생각’을 지어 1925년 ‘어린이(11월호)’에 보내 입선했는데, 이원수는 이 동시에 위로를 받아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최순애도 ‘어린이’에 실린 ‘고향의 봄’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이원수에게 편지를 썼고, 세 살 위인 이원수는 가슴 설레며 답장을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수없이 편지를 주고받다가 뗄 수 없는 펜팔 친구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1936년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인 부부였다.

이원수 선생은 현실 참여적 동시를 개척하면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확립에 기여하는 등 문학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등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용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해 친일행적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1935년 당시 근무하던 직장인 ‘경남 함안 금융조합’의 조합원들과 결성한 ‘문학 모임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또 그는 가난했지만 정부에서 쓰라는 글은 쓰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쓰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내년이면 ‘고향의 봄’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된다. ‘고향의 봄’은 재외동포, 교포에게는 망향의 노래이다. 한민족이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은 한민족을 하나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글로벌 콘텐츠로 승화시켜야 한다.

‘고향의 봄’ 100주년을 앞두고 소박한 기념사업을 기대한다. 기념시비, 노래비도 좋고,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동요 공모전도 좋다. ‘문화도시’ 창원특례시와 이원수 문학관 외에도 국내외 아동문학 단체와 지역의 독지가들이 함께 참여한다면 기념사업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김진호(정치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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