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이슬처럼 작은 것은 가져오세요- 김용택(시인)

이른 새벽 홀로 일어나 시를 읽다가 잠이 오지 않아 산책 나왔다고 말하며, 내 고민 좀 들어 주며 조금만 같이 걸어주지 않겠냐는 대통령을 만나보고 싶다.
텔레비전에 나와 이번에 이런 책을 읽었다고 좋아하는 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 중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나는 이번 휴가 때 이런 영화를 보았다고 뽐내는 재벌 총수를 보고 싶다.
때로는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한 장의 그림을 보았노라고, 어느 전시 때 본 그림을 찍은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는 정당 대표들을 지하철에서 만나보고 싶다.
거리를 걸으며 아이들과 만나 키를 낮추고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고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대해 말해 주는 교육감을, 그리고 이 책 갖고 싶으면 주겠다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나에게 이 책을 읽어보았냐고 읽던 책을 내밀어 보이는 선생님, 공무원을 만나보고 싶다. 아파트 공원 의자에 앉아 신간을 읽는 젊은 어머니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보고 싶고, 승용차 안에 읽다 만 이마누엘 칸트의 책이 있는 단체장을 만나보고 싶다.
도시의 변두리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돋보기를 코에 걸고 앉아 독서 중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곁에 누워 책을 읽다가 코 골며 잠든 기초의원들을 보고 싶고, 어느 소도시 작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젊은 연인의 잔잔한 사랑을 보고 싶다.
남의 시집을 사 들고 걸어가는 시인을 어느 거리에서 만나, 요새 읽었던 시집 이야기를 하는 시인들을 만나고 싶고, 지난번 시집 잘 사 보았다며, 나는 이 시가 좋다고 젊은 시인의 시구절을 읽어주는 노시인을 보고 싶다. 남의 소설책을 사는 소설가들을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보고 싶다.
파도치고 갈매기 날아다니는 해수욕장에서, 깊은 계곡 물소리, 바람 부는 들길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나비가 앉은 풀꽃, 느닷없는 들길의 소낙비, 봄비 속에 개구리 울음소리, 이른 아침의 새소리, 푸른 산 위로 솟는 뭉게구름,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흐르는 강물 곁에서, 그런 것들과는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곁에 가만히 앉아 눈송이로 녹고 싶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어디를 멀리 갈 때는 올라브 하우게의 시집 ‘어린나무 눈을 털어 주다’라는 작고 가벼운 시집을 들고 간다. 올라브 하우게는 노르웨이 시인이다.
몇 년 전 노르웨이로 강연을 갔었다. 서점이 있는 문화 공간에서 강연 후 작가와의 대담 자리가 있었다. 대담하는 도중 나는 시집 한 권 때문에 올라브 하우게가 살았던 노르웨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번역된 이 시인의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우게라는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서 독자들이 좋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하우게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과수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평생을 살았다. 나는 작은 이 시 집의 시 중에서 이 시가 좋다.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올라브 하우게의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전문
나는 그의 시집 뒤에 실린 글도 좋아한다.
“하우게는 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스푼으로 마치 간호사가 약을 주듯 먹여준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았다. 슬픔과 감사로 가득했던 장례식은 어린 하우게가 세례받은 계곡 아래 성당에서 있었다. 말이 끄는 수레가 그의 몸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관을 따라 내내 행복하게 뛰어갔다.” ―로버트 블라이(시인)
나는 평생 이만한 시 한 편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좋다. 이 시집을 읽게 되어서. 이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나는 무엇이 부럽지 않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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