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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49) 서양화가 박두리

숲과 대지에 숨겨진 우주

기사입력 : 2013-11-04 11:00:00
대지- 봄을 기다리며
Spring is in the air
숲의 비의
바다 이야기
유년의 동산
Spring is in the air
박두리 서양화가가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은 소녀가 있었다. 습기 가득 밴 큰 눈망울, 꼭 다문 입술, 두 갈래로 야무지게 묶은 머리. 소녀는 예쁘기도, 똑똑하기도 했지만 친구들 속으로 휩쓸리지 못했다. 모든 것에 쭈뼛거렸다. 수줍어서인지 용기가 없어선지, 선뜻 다가서지도, 자신을 드러내기도 힘겨웠다. 때문에 좋거나, 나쁘거나 모두를 마음속에만 꾹꾹 담아둬야 했다.

이런 소녀에게 땅이 친구가 됐다. 땅은 소녀의 마음에 담아둔 응어리를 쏟아낼 수 있는 편하고 널찍한 공간이었다. 내키는 대로 그려놓고, 또 마음대로 지울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소녀의 외갓집은 땅콩이 많이 나는 창녕 남지다. 설탕같이 부드럽고 사각거리던, 시골길 흙의 촉감은 오래오래 손끝에 남았다. 소녀는 훌쩍 커 화가가 됐고, 땅과 흙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겨왔다.


서양화가 박두리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나에게 땅은 고향 같은 의미였다. 언제나 갈 수 있고, 가고 싶은 포근한 외갓집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땅은 척박하거나 황량한 것이 아닌, 부드럽고 풍요로운 대상이었다. 또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원천, 즉 어머니의 자궁(子宮) 같은 안락한 은신처였다”고 했다.

박두리의 캔버스는 대지(大地)가 됐다.

작가는 그 위에 땅이 품고 있는 모든 형상들을 끄집어냈다. 작거나 하잘것없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 바람, 먼지, 흙 알갱이, 곤충, 동물, 나무, 집, 사람 등등. 작가는 “볼 수 있는,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분명 있었고, 모두에 가치가 매겨져 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존재일 수도, 또 내 자신일 수도 있다. 그림은 각각의 형상화를 통해 존재를 알리고, 각각이 가진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작가가 땅의 속과 겉을 집요하게 끌어낸 것은, 이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이들이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작가의 ‘드러내기’ 작업은 지루하리만큼 은밀하고 집요했다. 작가의 붓질은 드러내고는 싶지만, 혹 누가 금방 알아채기라도 하면 부끄러워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으로 같은 자리를 수십 번 오갔다. 때문에 대지 위에 나타난 대상들은 속이 깊고 알찬 뿌연 부유물(浮遊物)로 나타난다. 대지 위의 작업은 1999년에서 2004년까지 계속된다. 이후 작가는 희거나 황톳빛이었던 대지를 녹색으로 바꾼다.

“본래 컬러를 좋아했다. 흙이나 황톳빛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그림이 어두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가뜩이나 비구상이라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어둡기까지 했다. 꽃이나 나무, 집, 동물 등의 도입과 배치도 형식에 얽매이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좀 더 회화적이고 평면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했고, 숲이 그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했다.

숲 또한 대지의 일부여서 거부감은 없었다.

이렇게 숲과 나무가 캔버스가 됐다.

작품은 전체적인 숲의 이미지이지만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느낌을 중요시하는 편안함을 추구했다. 얽매임을 떨쳐내긴 했지만, 작업은 여전히 미련했다. 작가는 “대지에서처럼 숲에서도 나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느낌 저런 느낌, 이 색깔 저 색깔을 오가는 노역(勞役)은 더욱 심해지고 길어졌다. 이는 드러냄, 즉 형상을 최소화하려는 과정이다. 드러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지난(至難)한 사투와 갈등, 조합, 균형 등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작가는 숲을 헤치고 다니는 탐험가처럼, 예민한 감성을 곤두세운 채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춰선다. 몸도 호흡도 정지되는,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심연(深淵)에 빠지는 순간이다. “내가 붓을 놓는 시점은 늘 그렇다. 가장 화면이 안정되고 색도 단순화되는 때다. 붓질을 중첩하는 것은 형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숲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다. 깊은 숲속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너무나 소중한 억겁(億劫)의 시간과 공간들이 목격한 히스토리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박두리의 최근 작품은 화사한 분홍빛과 노란빛이 더해졌다. ‘꼭 초록이어야 하는가’는 자문(自問)의 결과다. 봄의 분홍빛 진달래가, 가을의 노란빛 단풍이, 겨울의 눈덮인 하얀 산과 들판이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푸른 바다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언제고, 어디서나, 무언가의 가치는 분명히 존재하고 또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내게 계절은 회화의 다양성 추구다. 각각의 계절은 각각의 빛과 공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화면을 활성화시키고, 에너지를 불어넣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기는 모든 것은, 크지 않은 작은 몸짓,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열심히 사는 모습들이다”고 했다.

숲이 됐든, 대지가 됐든 결국은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발견해 내기 위한 창(窓)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 속에 숨겨진 무언가의 가치를 통해 보는 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기를 바라고 있다. 존재감의 발견은 곧 숨겨지거나, 숨겨 놓은 자신의 가치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림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기분 좋은 쪽으로.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숲과 대지의 공기를 호흡하며 담겨져 있는 메시지를 통해 자존(自尊)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박두리의 작품은 대작(大作)이 많다. 보다 사람을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면 깊이 모를 블랙홀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때론 땅속으로, 때론 숲속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자신을 포함한 그 안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귀하게 보이는 마술에 걸린다.

이것이 박두리의 힘이다.

작가는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 무한한 우주의 섭리를 화면에 아우르고 싶은 나의 작품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란다. 비가시적인 세계의 알 수 없는 무엇을 엿봄으로써, 제 각각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작고 미미한 몸짓들이 휴식의 공간을 마련하고 위로를 얻기 바란다”고 했다.

글=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서양화가 박두리= 1958년 마산 출생. 1981년 세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2000년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과 졸업. 마산제일여·중고 교사, 경남대·창신대 강사. 동서미술상·마산미술인상 수상. 개인전 24회, 기획·초대전 다수. 현 한국미술협회, 신작전, 선과색동인, 마산대 출강



☞취재 뒷이야기= 작가는 몇 해 전부터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작업실과 전시실을 겸한 전원주택을 지어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작가는 전시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대형 작품들을 걸어두고 바닥에 방석을 깔고 감상하는 식이다.

서울 인사아트 전시회 때 자신의 작품을 보고 “숲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한 데서 힌트를 얻었다.

더불어 토크도 함께하는 전시회도 구상 중이다. 서로의 느낌을 공유하고, 작가와 대화하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사회봉사도 생각하고 있다. 도심 곳곳에 벽화를 그리고, 힘들게 작업하는 화가들을 돕고 싶단다.

해외 활동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작품이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해외 전시에서 ‘색다르고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작업의 깊이를 더해 체계적인 해외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중국과 미주, 유럽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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