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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51) 서양화가 박현효

즐거운 나의 파라다이스

기사입력 : 2014-02-24 11:00:00
하동군 악양면 하덕마을 담벼락의 골목길 갤러리에서 박현효 씨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양화가 박현효 씨가 하동군 악양면 산골에 자신이 지은 집안의 작업실에 앉아 있다. 지난해부터 서포 김만중의 고독을 표현하기 위해 바닷가 돌멩이를 소재로 하고 있다.
1990년 作 ‘기다림’
1992년 作 ‘빈 집이 있는 그림’
1997년 作 ‘돌아가는 땅’
2006년 作 ‘고사관수도’
2010년 作 ‘악양동매’
2013년 作 ‘남해 노도가는 길’



그는 꿈을 옮긴다. 그가 그리는 꿈은 특별한 게 아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떠올릴 법한 평범하고 행복한 상상이다.

한 번쯤 가고 싶은, 또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낙원(樂園)의 모습이다.

그의 낙원은 전혀 복잡하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편편한 너른 바닥 위에 그냥 편하게 툭툭 던져놓았다.

고된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옷이며 밀집모자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고 대청마루에 벌러덩 눕는 그런 풍경이다.

그는 그림은 마주하는 순간 시원하고 쾌적하고, 그래서 즐거우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그림 속에 많은 것을 담지 않으려 한다. 가볍고 간단하게, 짜맞추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좋다. 그림을 보고 내가 즐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캔버스를 마주할 때 스스로가 즐거워지기 위해 늘 애를 쓴다”고 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억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꼭 이렇게 해석하고, 꼭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압적인 메시지가 없다. 이것저것 끌어다 화려하게 분장(扮裝)시켜 눈을 현혹시키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고 분명하다.

그는 ‘보이는 만큼 보고, 보이는 만큼 즐겨라’고 가볍게 청한다.

그것이 궁극의 목적지, 낙원(樂園)에 다다르는 바른 길이라고 했다.







서양화가 박현효를 만난 것은 하동군 악양면의 한적한 골짜기다.

차가 다니는 길에서 산쪽으로 중간쯤에 살림집과 작업실이 있다.

외딴집이다. 앞으로는 작은 계곡이, 뒤로는 과수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겨울이라 조금 황량해 보이지만, 다른 계절엔 계곡물도 꽤 시끄럽고 온갖 새들이 날아들고, 풀과 나무들이 제 모양과 향기를 내기 바쁘다고 한다.

작가와 ‘자연(自然)’은 그리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작가답게 살아보자’며 도시를 떠나온 게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작가는 “도시에서의 삶은 생활고가 해결되는 것도, 그렇다고 그림이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저것도 아니면 그림이나 열심히 그려보자며 시골로 향했다”고 했다.

도망치듯, 숨구멍을 찾기 위해 치열한 도시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창원을 빠져나와 거창에서 합천으로, 진주로, 다시 현재의 하동에 파묻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바꿔진 시간과 공간은 그림도 변하게 만들었다.

정확하게는 변한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작가 스스로가 녹아들었다는 게 맞겠다.





대학을 졸업한 후 89년 첫 개인전에 내걸린 그림은 다분히 사회참여적이었다.

당시의 청춘들이 그러했듯 독재와 억압, 그 틈에서 희망을 좇는 메시지들을 캔버스 가득 담았다.

어둡고 붉은 빛깔, 굵은 붓터치가 소재만큼이나 묵직하고 거칠었다.

작가는 “작품에는 보고, 느끼고, 추구하는 게 담길 수밖에 없다. 당시는 그랬다.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부조리를 깨뜨리고 싶은 다분히 전투적(?)인 의식이 가득했던 것 같다”고 했다.

작가의 이 같은 의식은 거창에 와서도 이어진 듯하다.

세상을 조금은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고자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92년 두 번째 개인전 ‘빈집이 있는 그림전’도 황폐화되는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담았다.

빈집에 남겨진 녹슬고 먼지를 뒤집어쓴 각종 물건들을 통해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불안하고 서글픈 심경을 표현했다.

거창에 이어 옮겨온 합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합천호 인근에 터를 잡은 그는 댐 건설로 인해 물에 잠긴, 이로 인해 파괴된 마을의 모습을 그렸다,

여기에서 약간의 변화된 메시지가 담기기 시작했는데, 바로 ‘희망’이었다.

삶의 터전은 뭉그러졌지만, 그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캔버스에 이끌어냈다.

손바닥만한 밭, 곧 쓰러질 듯한 조그마한 집이지만 이를 통해 삶을 이어가려는 애착이 그림에 담겼다.

작가는 합천에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북, 나무판자, 깨진 도자기, 가구 등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도 만들었다.

버릇처럼 돼버린, 주변을 놓치지 않는 부지런함의 결과다.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에서 뭔가 자유스럽고 즐기는 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머릿속 관념보다는 대상이 가슴에 전달하는 느낌을 꾸밈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주어진 환경과 병치(倂置)하는 작가 특유의 시적 메시지가 화폭에 옮겨지기 시작한다.





90년 중반 이후 진주 수곡면에 이어 하동 청암(현 옥종면)으로 터를 옮겨왔다.

이곳은 이전의 빈집들과 수몰지역과는 분명 달랐다. 온화하고 편안한,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가득한 곳이다.

이때부터 작가는 본격적으로 그림 위를 노닌다.

관념이 아닌 감성, 즐거운 상상들을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이전의 황폐함이나, 애써 희망을 찾는 절박함 대신 자연의 평화로움이 표현됐다.

작가는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고, 조금 더 자유스러워지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작품에는 느긋하고 재미있는 관조(觀照)가 담겼다. 자신이 낙원(유토피아)을 꿈꿨고 그 꿈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구도와 색채, 조형성도 이를 위한 것으로 변모됐다”고 했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자연들이 스스로를 직접적에서 은유적으로, 가슴속 얘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낙원에 대한 공유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구체화했다.

작가는 “대리만족의 권유라고 해도 좋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도 하고 싶을 것이고, 작품 속 사람은 관객 누구나다. 지루한 도(道)를 닦는 게 아니라 즐기는, 이상향을 건설하고 싶은 소망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그림 속에 풀었다”고 했다.

2000년 초 청암으로 옮겨와 내놓은 작품은 동화(童畵)에 가깝다.

작가는 “보다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자기의 생활을 회화화하는 작업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맘껏 즐거운 상상을 했고, 그 상상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 충실했다. 아이들이 흙마당에 제멋대로 그리듯”이라고 했다.

이즈음 그의 작품 밑색은 코발트, 노랑, 빨강 등 원색(原色)이 주류를 이룬다.

작가는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에 다다르는 색채라고 생각했다. 원초적이면서도 강렬한, 그래서 군더더기 없는 열망을 표현하기 적합했다”고 했다.





그가 지금 자리한 곳은 골짜기다. 골짜기는 그가 그림을 계속하기 위한 안식처 같은 곳이다.

작가는 “아무래도 골짜기 체질이 모양이다. 골짜기에 들어 앉으면 어쩐지 편안하고, 새로운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다. 주변의 자연과 노닐 수 있고, 또 다음의 둥지에 대해 동경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세상사의 먼지가 묻어 들어오지 않는 깊숙한 자연이 오감을 예민하게 만드는 데 딱이라는 얘기다.

지난해부터 서포 김만중의 고독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바닷가의 흔한 돌멩이가 등장하는데, 거칠고 때론 매끄러운 돌의 질감에 매료됐다고 한다.

돌은 자신만의 공간이자 변하지 않는 섬이다.

돌 위에 나무, 집, 꽃 등을 배치해 생경하고 신선한 상상을 유추해 낸다.

여기에 별도의 메시지는 없다.

색깔과 구도만으로 즐거운 유토피아를 이끌어낸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억지로 담지 않아도 낙원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작가는 “유토피아는 변하지 않은 나의 주제(主題)다. 기법은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론이다. 지금의 돌도 방법의 하나일 뿐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며 “향후 조금은 사실적인 구상작업을 해보고 싶다. 조각과 함께할 수 있는 작업들로 입체감이 있는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디든, 무엇이든 그의 눈과 가슴을 통과하는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변모시키는 묘한 힘을 지녔다.

그가 또 어디에서 무엇을 만날지, 또 그 즐거움을 어떤 모양으로 빚어낼까.
 

글=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w.co.kr


☞박현효

1962년 진주(옛 진양 이반성면) 출생. 창원대 예술대학 졸업. 개인전 11회. 단체전 ASIA & RICE전 등 다수. 현 경남민족미술인협회, 구십회, 백두대간 회원.<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