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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14) 서양화가 이동순·박두리

색과 덧칠이 품은 내면세계… 닮았구나, 한눈에 알아봤죠

기사입력 : 2014-05-19 11:00:00
서양화가 이동순(오른쪽)씨가 자신의 진해 작업실에서 박두리 화가와 인터뷰 도중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두리 作 ‘꿈꾸는 나무’
이동순 作 ‘Memory 3’


이른 새벽. 눈 덮인 길을 나선다. 처음 마주하는 낯선 길이다.

앞서 지나간 몇몇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어디를 따라야 고향집에 다다를 수 있을까.

자칫하면 고향은 고사하고 산속을 헤매거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

아득하고 무섭다. 하지만 지금 길을 나서지 않으면 영영 고향땅을 밟지 못한다.

깊고 또렷하게 한 줄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르기로 했다.

분명 현자(賢者)가 남긴 것이리라.



◆연(緣), 마음속에 맺다

삶의 중간중간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앞선 발자국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나아가 그 행운을 자신의 삶속에 녹여내 새롭고 반짝이는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는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큰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서양화가 박두리. 그녀가 그를 만난 것은 혼자였고, 또 우연이었다.

지난 2005년 창원 성산아트홀 전시장. 서양화가 이동순 교수의 11번째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전시장을 들어선 박두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작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당시에는 지역에 좋은 전시가 없었던 터라 늘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내게는 참으로 어려웠던 파란색을 자유자재로 대담하게 그려낸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고 반가웠다. 어떻게 파란색을 이렇게 잘 낼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림 앞을 쉬 떠나지 못했던 그녀는 몇 시간을 머무르고서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박두리는 그즈음 대지(大地)를 주제로 한 작품에 몰입해 있었다. 두텁게 덧칠한 황토빛 틈새로 보일 듯 말 듯한 형상들을 배치해 어머니의 너른 품 같은 대지가 품고 있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비구상이다.

박두리는 “유형이 다르고 색상도 달랐지만 내면의 세계를 이미지화하는 작업과정의 동질성(同質性)을 느꼈다. 이 교수의 작품은 일견 심플했지만 본질(本質)이라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집요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때부터 이 교수와 마음의 연(緣)을 맺는다.



◆연(緣), 작품속에 녹여내다

박두리는 이 교수와의 인연을 가슴속에서만 키워와야 했다. 이따금 미술잡지나 전시회 소식 등을 통해 작품만 만났을 뿐 ‘멀지 않은 부산에 그런 작가분이 계시는구나’ 정도였다. 간간이 들춰보는 마음에만 담아둔 인연은 그녀의 작품에 어렴풋이나마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첫 만남에서 꽂힌 블루톤은 그녀가 색채를 바꿔나가는 데 동기와 용기가 됐다. 대지의 황토빛은 숲의 녹색으로, 또 봄의 연분홍과 노랑으로 진화해 갔다. 그 과정에서 내면의 이미지를 전하는 메시지는 더욱 또렷해지고 강렬해졌다.

그녀는 “색을 바꾸는 것이 표현방식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메시지의 그릇이 바뀔 뿐 전하고자 하는 내용물은 그대로다. 보다 편하게, 또 직접적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작가적 노력이 멈춰서는 안 된다. 이 교수의 작품들은 뭐라 집어낼 수는 없지만 나의 작업이 변해가는 데 동인(動因)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연(緣), 서로를 확인하다

신라대 교수였던 이동순 교수는 지난 2011년 퇴임했다. 이후 아내의 고향인 진해로 거처를 옮겼다. 흑백다방 건너편에 작업실을 열고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고향도, 그간의 생활도 지역과는 동떨어진 곳이라 진해는 타향이나 마찬가지였다.

2012년 어느 날, 창원상공회의소 쳄버갤러리에서 노충현 초대전이 열렸다. 지인을 통해 작가를 알고 있은 터라 개막식에 참여했다. 지역 작가들과 얘기를 하고 싶기도, 또 지역 미술계의 분위기를 알고 싶기도 했던 터였다.

이 교수도 박두리도 이때 비로소 눈 인사를 나눴다. 박두리로서는 혼자만의 오랜 연(緣)을 끝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박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은 진해로 옮겨온 최근의 일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내면 세계를 형상화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 배어 있었다. 아주 진지하고 깊은 자신의 세계를 지녔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선한 데다 진지하고 겸손한 터치가 완성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이미지나 메시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기법이라든지, 색깔과 덧칠로 내면의 깊숙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많이 닮아 내심 놀라웠다.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일찍 만났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시공(時空)이 두 작가를 갈라놓았을 뿐 작품을 통한 인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진 듯하다.



◆연(緣), 먼발치에서 조금은 남다르게 지켜보다

작가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대부분 폐쇄적이다. 좀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고, 안으로만 삭이고 또 삭인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몸뚱아리를 녹이는 독(毒)일지라도,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의 숙명이다.

이 교수와 박두리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고, 또 자신과 유사함을 확인했지만 선뜻 다가서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저 먼발치에서 동류(同類)가 살아가는 모습을 조금은 남다르게 지켜볼 뿐이다. 이런 게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존중이라 여긴다. 가끔 만나 나누는 짧은 대화도 무척 조심스럽다.

박= 교수님 최근 작업은 이전보다 회화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요. 아마도 순수미술 쪽으로 관심을 두는 것 같아요.

이= 얼마 전부터 변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졌어. 욕심을 다 내려놓고 조금은 편하게, 지난 일들을 떠올리듯 그리고 있지. 일기(日記) 쓰듯이.

박= 전 아직 편하지가 않아요. 아직도 작품의 변화와 작업량에 대한 숙제를 떠안고 있어요. 하루에 4~5시간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식이죠.

이= 그건 나도 그랬지. 과정이야. 지금의 박 작가는 일 욕심을 잃어서는 안 되지. 열심히 하되 전시를 위한 작업이 안 됐음 해. 꼭 붓질을 해야만 작업이 아니야. 계획도 작업의 일종이지. 그러면서 정신적인 힘도 얻고 그런 게 윤활유가 돼 작업에 대한 에너지를 얻는 거지. 그림 그리는 게 노동이 되면 그림 보는 사람도 힘들어.

박= 그런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쌓이면 무언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기대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어요. 다른 작가들도 그런가요.

이= 대부분 그렇지. 그게 또 정상이고. 되돌아볼 수 있는 나이도 아닌데 뒷짐지면 안 되지. 온갖 풍상을 겪고서야 작가의 궁극적인 여로(旅路), 즉 순수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어.



◆연(緣), 서로에게 길을 묻다

박두리는 이런 대화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박= 캔버스만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건지, 또 바로 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요. 훗날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얼마나 짐을 가볍게 하는지 몰라요.

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되돌아보고 고민하는 것이 옳은 자세지. 특히 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형식에만 지우친 것들을 의미있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자극제이자 신선한 충격이 될 수 있을 거야.

박= 맞아요. 작업에 대한 고민은 주로 혼자서 해결했어요. 자극을 주고 받는 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를 통해 스스로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고요.

이= 쉽지는 않은 일이야. 상대방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고. 서로 두려워 피하는 경향이 있지. 막상 얘기를 나누면 그게 아닌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이 교수는 박두리에게 회화의 순수성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이= 욕심이 범죄를 만들어. 교만과 오만을 버리면 인간의 순수함이 되살아나지. 의도적이거나 과시적이 아닌 순수가 작가의 영혼을 맑게 하지.

박= 옳은 말씀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그림에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욕심을 가득 담았죠. 그림을 통해 사회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요. 이제 조금씩 그림이란 게 묵직하고 심오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림답게 표현하면 보는 사람도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 옳은 생각이야. 미술이나 사람이나 억지로 만들면 오래 못 가. 그림에 순수한 마음을 쏟아내면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거야.

박= 힘을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로서 또 존경하는 작가로서 항상 지도해 주시면 좋겠어요. 또 좋은 작업 계속하시면 그것이 제가 따를 길이 아닐까 싶어요.

이날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멈췄다. 이야기는 또 이어질 것이다.

글=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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