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거부의 길] (1195) 제21화 금반지 사월의 이야기 ⑪

‘이 남자는 학자가 되었어야 해’

기사입력 : 2017-10-18 07:00:00
메인이미지


남자가 난처한 듯이 물었다. 윤사월은 자신이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목이 붓도록 울었다.

“옷도 너무 더러워.”

남자는 시장에서 옷을 사다가 그녀가 입게 했다. 윤사월은 새옷을 입자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몽롱했던 정신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하는 일은 전국에서 잣을 사 모으고 다방이나 한약방, 견과물시장에 잣을 되파는 것이었다.

다방에는 쌍화차와 인삼차 등에 잣이 들어갔고, 한약방에도 잣이 필요했다. 남자의 장사는 비교적 잘 되었다. 잣을 사고파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를 정도로 잣 장사는 희귀했다. 잣 상인이 귀하니 다른 곳에서 잣을 살 수가 없었다.

윤사월은 남자의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를 했다. 그는 돈 관리도 비밀스럽게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내가 돈을 훔쳐갈까봐 두렵지 않으세요?”

하루는 윤사월이 남자의 가슴에 안겨서 물었다.

“허허. 나는 네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요? 사람을 믿으면 안 돼요.”

“그래도 너는 다르지.”

“왜요?”

“너에게는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너는 나로 인해 좋은 옷 입고… 맛 있는 음식 먹고… 부자로 사는데 왜 도망을 가냐?”

“아저씨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내가 괜히 약이 오르네.”

“사람이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좋은 여자가 옆에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를 삼호(三好)라고 한다.”

윤사월은 남자의 말이 알 듯 모를 듯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심심할 거야. 심심하면 나를 따라나서고….”

남자가 말했다. 사월 어느 날이었다. 남자를 따라 강원도 횡성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횡성에 잣나무가 많아 잣의 수확이 많다고 했다. 영리한 잣 상인이 값이 떨어지는 수확기를 피해 봄에 판다고 했다.

“기차여행을 할 때는 삶은 달걀이 별미야.”

횡성으로 가는 기차에서 남자가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 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 올라왔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 준 남자가 없었다. 윤사월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이름은 이춘식이야.”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는 장사를 하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 남자는 학자가 되었어야 해.’

윤사월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차는 덜컹대고 달리고 있었다. 차창으로 꽃이 핀 산골 풍경이 지나갔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