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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2 (7) 백색공간/안희연

기사입력 : 2017-11-02 15:18:12
 
 이어서 들려드릴 곡은 … 입니다.
 진행자가 무심하게 곡 제목을 읊었을 때
 나는 잠시 손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어요.
 어떤 음악은 듣는 이에게 감상을 바라는 태도를 넘어 감상을 '강요'하기도 하거든요.
 
 매일 아침마다 그렇듯,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거울에 딱 붙어 서서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올리는 중이었죠.
 '팔려간 신부'.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스메타나의 작품. 프라하에서 1866년 초연된 오페라.
 따따딴 딴딴따라라라라 딴딴딴 따라라라라라 딴딴딴
 딴따따라 따라라라라라라라 딴딴딴딴 따라라라라 딴딴따라
 스피커에서는 '팔려간 신부' 서곡이 흘러나왔습니다.
 당신 생각이 났어요. 나는 신부가 되어 팔려갈 뻔 했거든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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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신을 집안 어른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완연한 봄날 부산의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고
 주선자는 커피를 홀짝이며 우리 두 사람 얼굴을 번갈아 보며 거듭 강조했었죠.
 '이 호텔에서 선을 보면 결혼 성사가 그렇게 잘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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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재력에 대해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내가 아침 일찍부터 단장을 마치고 잘 입지도 않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화려한 호텔 소파에 다소곳이 나앉은 이유였으니까요.
 나는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다부진 몸, 두꺼운 손마디, 볼록한 이마, 뭉툭한 콧방울이…
 당신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당신의 부(富)를 대변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부산 경남 일대에 금싸라기 땅과 빌딩을 몇 채 소유하고
 재단법인 이사장 직함을 가진 유망한 사업가였습니다.
 당신은 내 시선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슬며시 웃기만 하더군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남자는 내가 마음에 드는구나.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해도 될까요.
 이조(李朝)시대라면 족보에 기대어 콧대 높이고 살았을 겁니다.
 유학(儒學)을 한 자손들이 입신양명해 집안을 일으키고
 대(代)가 거듭되다 보면 걸출한 문인이나 명필, 학자,
 더 나아가서는 인물사전에 등재될 만 한 뛰어난 목민관도 배출했겠죠.
 청빈과 체통, 도리, 정절, 충효… 그런 부질 없는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래요. 나는 그런 한미한 가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각광받을 것 하나 없는…
 일말의 자존심 외에는 남은 것 없는 집의 딸이었습니다.
 자존심만으로 다져진 빈약한 정신은 내게도 어김없이 대물림 되었고,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으로 당신의 부에 관심이 없어야 했습니다.
 물질 이상의 것을 갈구하라.
 맞아요. 나는 21세기에 육화(肉化)되어 살고 있지만
 정신은 구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당신이 소유한 것들에 딱히 관심이 없었고,
 이제야 고백하건데 사실 있어도 없는 척 하는 것이 내겐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그런 경직된 태도가
 당신의 마음을 내게로 흘러오게끔 하는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았죠.
 내가 당신의 구매력에 냉담할수록 당신은 나의 본질을 탐했습니다.
 사실 짐작하고도 남을 일들이죠.
 지난날 당신에게 접근했을 여자들이 어떤 목적을 가진 여자들이었을지.
 영악한 그녀들은 '당신'보다 '당신이 가진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았겠죠.
 
 다년간의 경험으로 당신은 거의 동물에 가까운 어떤 감각을 지니게 된 것 같았습니다.
 이 여자는 나의 무엇에 탐닉하는가. 나의 빌딩인가, 나의 사랑인가.
 나는 당신의 그런 예리한 감각에 걸려들지 않은 드문 케이스였던 거죠.
 그러니 나는 방탕한 물질세계에서 겨우 피어난 한 줄기 풀꽃이었던 겁니다.
 적어도 당신의 인식 속에서는 말이죠.
 
 그해 봄은 정말 내게 다시없을 봄날이었던가요.
 당신은 창원대로를 쌩하고 달리면 누구나 쳐다볼만한 잘 빠진 스포츠카를 타고
 스무평 남짓한 내 오래된 전셋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곤 했습니다.
 차를 타고 백화점에 가면 당신은 내 월급으론 감당하기 힘든 브랜드의 옷과 구두를 안겼죠.
 두어 번은 운전대를 잡게도 해줬습니다. 신이 났었어요. 사실.
 수억 짜리 코트를 걸치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된 것 같았죠.
 유경씨, 이 차가 말이죠. 최대토크가 얼마고 가격은 얼마예요, 결혼하면 유경씨가 몰아요. 네?
 갈수록 미안해졌습니다. 당신은 들떠서 그런 이야기들을 속삭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을 담을 단단한 그릇이 아니었고
 사랑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배짱 좋은 여자도 아니었으니까요.
 
 다 지난 이야기지만 말이죠.
 당신을 만나던 날들은 사실 전쟁 같은 이면을 가지고 있었어요.
 집에만 가면 부모님과 감정적으로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청빈, 고결, 무엇보다 사랑을 가르쳤던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부 앞에서 30여년동안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을 일시에 벗어던진 것 같았습니다.
 헛똑똑아. 살아봐라. 뭐가 중요한지. 스무 살 철부지도 아니고. 아직도 사랑타령이냐.
 이렇게 다그쳤다가,
 살면 그 놈이 그 놈이다. 얼마나 편하냐. 넌 애 키우면서 글이나 쓰고 살면 되잖니.
 이렇게 타일렀다가.
 나는 점점 당신의 부, 재력, 돈, 힘,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심으로 두려워졌어요.
 거기에 굴복하면 나는 스메타나 말마따나 '팔려간 신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귀엽죠?
 
 당신과 멀어진 후 당신 생각이 날 때가 없진 않았어요.
 이를테면 저번 주에 말이죠.
 내 낡은 전셋집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오래된 보일러 직수 배관이 터져 베란다가 물바다가 된 거였죠.
 아침나절부터 인부를 부르고 출장비와 부품비를 지불하고
 배관이 10년이 넘었으니 더 큰 일 나기 전에 교체하라는 조언을 듣고…
 난장판이 된 베란다에 서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배관을 바꿔달라는 나의 요구에 집주인은 쌀쌀맞게 응대하더군요.
 그렇게 싼 값에 전세 들어 살면 아가씨가 적당히 고쳐가며 살면 안 되나?
 사실 요새 시세로 하면 월세를 몇 십 더 받아도 되는데… 안 그래요?
 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어요.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슬픔 혹은 분노 같은 것이 치솟았지만 침 한번 삼키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걸레로 여기저기 튄 물을 쓱쓱 닦는데, 가만히 당신 생각이 났어요.
 당신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당신 소유의 빌딩 로열 층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 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있을지 모르죠.
 보일러 배관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몰라도 되는 삶을 영위했을지도,
 아들딸에게 구시대의 이데올로기 대신 금수저를 물려줄었을지도 모르죠.
 나는 정말 헛똑똑이에 철부지였던 걸까요.
 
 그런데 말이죠.
 당신에겐 재력이 있듯 내겐 자존심이 있잖아요.
 당신이 얻을 수 없었던 그것 말입니다.
 아마 당신에게 내 본질을 팔지 않았다는 그 한낱 쓸데없는 자존심도
 내 안에 어떤 징표처럼 남아 몸과 정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겠죠.
 돈 때문에, 그 놈의 돈 때문에, 삶이 힘겹다고 느낄 때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올 당신.
 당신을 잠시 알았던 것, 덕분에 재물의 위력을 알았던 것,
 그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니 나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동안 당신이 종종 그것을 일깨워 주리라 믿습니다.
 스포츠카를 가지지 못했지만
 스포츠카를 타고 대로를 내달리던 그 기분으로 살라고.
 물질 이상의 것,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라고.
 가끔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느낄 때
 그렇게 베란다에 낭패스런 얼굴로 서 있을 때
 유리창을 부수며 이렇게 소리쳐 주세요.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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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백색공간'-안희연/창비/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2015)/1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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