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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우선’ 인식전환·환경개선 필요

[기획] 길 빼앗긴 보행자들 (3) 대책

지난해 도내 교통사고사망자 373명

차-사람간 사고사망자 36% 달해

기사입력 : 2017-12-05 22:00:00


“교통의 원활한 흐름이 시민들의 안전과 이동편의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남지역 18개 시·군 150여 초등학교의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 실태를 점검해 지난 8월 ‘경남지역 스쿨존 점검 보고서’를 펴낸 김용만 경남도교육청 스쿨존 담당 파견교사는 “보행환경 개선이 긴요한 곳을 각 시·군에 통보하고 안전시설 설치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럴 예산이 없다’와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서 할 수 없다’는 두 가지 답이었다”며 “결국 내가 경험한 것은 여전히 ‘사람보다는 차가 먼저’라는 인식이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경남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 373명 가운데 차와 사람 간 일어난 사고로 숨진 사람은 135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36.2%에 달했다.

김 교사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차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보행을 위협하는 ‘위험수단’으로 인지해야지, 사람들을 더 편리하게 해주는 ‘편의수단’으로 여겨선 안 된다”며 “특히 시속 60~70㎞인 도로의 속도제한을 30~50㎞로 낮추고, 어린이보호구역 범위를 확대해 대부분 지역이 ‘스쿨존화’될 수 있을 정도로 보행환경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에게나 가장 평등한 이동수단인 보행권이 차량의 통행권보다 더 우선시돼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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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대각선 횡단보도에 보행 신호가 들어왔지만 한 운전자가 우회전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이 같은 시도는 해외에서부터 시작된 이른바 ‘카 프리 시티(Car Free City)가 공공 트렌드로 자리 잡으며 성과를 보이고 있다. 스페인의 ‘차 없는 도시’인 폰테베드라는 지난 1999년부터 2014년까지 15년에 걸친 혁신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시는 차량 진입을 금지하는 구역을 도시 중심부로부터 도보 10분 거리로 확정하고, 외곽에 8만대 규모의 주차장을 설치해 무료로 사용하도록 했다. 인구 6만명 수준의 소도시에서 출퇴근시간에 2만7000여대의 차량이 움직이면서 보행환경 악화는 극에 달했고, 집단적인 건강문제까지도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시가지에는 대중교통 없이 오로지 걷는 사람들로 채웠다. 그러자 점차 골목상권이 살아났고, 아이들도 마음대로 뛰어놀며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변해갔다. 미국 뉴역 브로드웨이는 차로 수 축소와 보행 플라자(광장) 추가 설치, 자전거도로 위치 조정 등을 추진했고, 영국 런던의 경우 혼잡통행료를 징수하는 대책으로 도심에서 자동차를 줄여 보행환경을 개선했다.

국내에서도 2012년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제정과 함께 국민의 보행권 확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은 마련돼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동참하고 있지만, 보행자들이 잃은 길을 찾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행정안전부는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를 42% 줄이고, 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교통안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9월 ‘보행안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주된 내용은 △보행자 중심의 법·제도 정비 △보행안전·문화의식 향상 △보행 안전 인프라 확충 △취약계층 보행 안전 개선 △새로운 보행 안전 위험요소 대응 등이다. 특히 보행자 통행량이 많고 사고가 잦은 주택가와 상가 밀집지역 등 생활권 이면도로의 차량 속도를 30km로 제한하는 ‘30 구역’ 지정도 포함돼 있다.

보행자 이동편의 증진을 위해서는 보행 밀집지역 내에 있는 불완전한 ‘ㄴ형’, ‘ㄷ형’ 횡단보도를 ‘ㅁ형’으로 개선하고, 보행시간 단축 효과가 큰 대각선 횡단보도 설치를 확대할 예정이다. 행안부 안전개선과 관계자는 “이전의 보행환경 조성사업이 인프라 구축에 중점을 뒀다면, 이번 종합대책은 사람 중심의 보행안전문화 확산 등을 모두 포함하는 내용이다”며 “지역 특성에 맞는 보행자 중심 교통안전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자체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고령화율 등을 반영한 정책 연구를 통해 보행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입장이다. 경찰청 교통운영과 관계자는 “보행자 사망 사고나 횡단보도 상의 안전사고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 보행자 위주의 신호체계를 마련하고 있다”며 “필요한 부분은 법령 개정을 통해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물리적인 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토지이용, 교통, 건축, 보건, 공원녹지, 상권 등 모든 도시행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보행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경훈 창원대 토목환경화공융합공학부 교수는 “창원 상남동 등 상권이 대규모로 형성돼 있는 경우 단순히 차를 막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보행환경 조성뿐만 아니라 주변 상권 활성화와 보행환경을 모두 고려한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서울시가 지난 201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보행친화도시 조성 사업‘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사례로 꼽았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장기적으로 현행 16%인 보행수단 분담률(도보, 자전거)을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도심부 속도 제한 강화 등 10대 사업을 골자로 사람 중심의 도시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아직 성공적인 정책이라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보행 친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지자체 단위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보행량, 차량 통행량, 도로 기능, 주변 상권 등을 고려해 지역 실정에 맞는 보행거리 조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들이 자가용 이용을 줄이고 많이 걸을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를 통해 보행 중심의 활동적인 삶(Active Living)이 가능한 주거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도영진·박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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