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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3-나의 이름은 청춘] 23살 시민 활동가 남어진 씨

‘투쟁의 기억’ 찍고 기록하고 나누는 ‘송전탑 청년’

기사입력 : 2018-02-13 22:00:00

열여덟 소년은 꿈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학교에 가고, 수능을 준비하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당연한 듯 해오던 일련의 과정들이 낯설어진 건 열아홉을 두어 달 남겨놓은 2013년 가을이었다.

“학교는 무풍지대 같았어요. 나쁜 의미로요. 밖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전혀 영향이 없을 것 같다는 게 더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공부가 싫어 교과서 대신 책을 택한 소년이 ‘용산참사’에 관한 책을 읽은 뒤였다. 포털사이트에서 밀양 송전탑 반대주민과 경찰의 충돌 기사를 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당시 밀양은 2008년부터 8년째 765kV 고압 송전탑 설치 문제를 두고 시민과 한국전력 간 분쟁 중이었다.

세상을 몸소 느끼고 싶었던 소년은 그 길로 짐을 싸서 밀양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지금 소년은 아직도 밀양에 있다. 이제는 청년이 된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활동가 남어진(23)씨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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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단체 활동가 남어진씨가 사무실에서 밀양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호기심 속 밀양은 참혹했다”

2013년 10월 3일. 어진씨가 부모님과 함께 살던 경북 구미의 집을 떠나던 날이다. ‘밀양이 궁금하다. 한번 갔다오겠다’는 고2 아들의 밀양행을, 부모님은 큰 반대 없이 허락했다. ‘몸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어진씨를 역까지 태워줬다.

그의 밀양행은 정의감이 불타올랐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호기심이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무실 ‘너른마당’ 이름까지 기억해냈지만 휴대전화를 챙겨나오지 않은 탓에 그는 한참을 헤매야 했다.

“주민들이 전기 때문에 고생을 겪고 있다고 하니 챙겨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랜 시간이 걸려 너른마당을 찾았지만 대책위 사람들은 어진씨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가 밀양으로 올 당시 밀양은 비상상황이었어요. 송전탑 반대주민들을 막기 위해 2000명이 넘는 경찰들이 밀양에 투입됐을 때니까요. 누군가 주민들을 만나려면 바드리마을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갔더니 참혹했어요.”

경찰은 고지를 이미 점거한 뒤였고 주민들은 올라가려고 했다. 경찰과 대치하던 주민들이 쓰러지는 상황을 목격한 어진씨는 주민들을 도와야겠다 싶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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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단체 활동가 남어진 씨.



◆미안함과 배려심을 배우다

“담임선생님과 교무부장님이 학교에 나오라고 밀양으로 찾아오셨더라고요. 학교에 안 나간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어요.”

얼마 뒤 어진씨가 학교로 돌아간 날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밀양으로 다시는 안 갈거냐는 질문에 어진씨는 다시 갈 일이 생기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도 월~목요일은 학교, 금~일은 밀양에 머무르던 그는 12월 한 어르신의 음독 자살 사건을 접하고 밀양으로 향했다. 약속대로 그는 자퇴서를 제출했다.

“부모님은 이해해주셨어요. 자퇴동의서에도 ‘우리 어진이는 학교 밖에서 배우고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적어주셨던 것 같아요.”

당초 송전탑, 핵 같은 것에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다. 그가 밀양으로 온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전기는 모두가 쓰는데 누군가는 그로 인해 삶이 휘청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안했어요. 근데 미안함만 있었다면 이렇게 오래 있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를 머물게 한 건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의 마음씨였다. 자신의 건강권, 재산권을 위해 시작했던 싸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고 어진씨는 기억한다. “이미 땅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난 상황에서 어쩌면 보상금이 클 수 있을 텐데 어르신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어차피 자신들은 늙었고 얼마 지나면 이 세상에 없다고. 우리가 포기하면 이 문제는 전국 어디에서든 재현될 문제라고요.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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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평화기행, 탈탈원정대북콘서트 등에 참여한 남어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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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평화기행, 탈탈원정대북콘서트 등에 참여한 남어진씨.



◆끝나지 않은 싸움을 담는다

어진씨는 밀양에 돌아오던 날부터 101번 농성장을 맡았다. 송전탑 이름을 딴 101번은 농성장 중 가장 높고 험한 곳이었다. 마을과 가까운 다른 곳과 달리 산속에 있어 물도 전기도 없었다. 물자가 많을수록 좋은 산속에서 젊은 피 어진씨는 주로 물을 날랐다. 한 번에 2ℓ짜리 생수 11~12병을 들고 오르기도 했다. 농성에서 부상자가 발생하면 업고 산을 내려가는 것도 어진씨의 일이었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이 이뤄지던 날 주민들도 어진씨도 더 이상 물을 나를 일이 없어졌다. 함께 싸우던 연대자들은 하나둘 밀양을 떠났지만 그즈음 어진씨는 연대자에서 상근자가 됐다.

“도움을 주다가 제대로 일을 맡게 된 거죠. 송전탑은 섰지만 밀양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주민 200명 정도가 송전탑 건설에 합의하지 않고 투쟁하고 있고요. 4~5년 전 경찰과 대치하다 주민들이 법적으로 처벌받은 사건의 진상조사, 공권력의 마을공동체 파괴 등 증명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습니다.”

대책위는 작년에 토크콘서트 개최, 밀양송전탑반대투쟁 책자·배지 제작, 투쟁의 기억을 나누는 농촌활동을 진행했다. 2014년 행정대집행 이후 격주로 꾸준히 열고 있는 촛불문화제도 빼놓을 수 없다. 어진씨는 주민들의 사진을 찍고 행사를 이루는 일련의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월~수엔 대책위 활동을, 목~토엔 목수 일을 하는 그는 이제 단순히 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상근자가 아니라 밀양서 먹고 자는 밀양 청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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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평화기행, 탈탈원정대북콘서트 등에 참여한 남어진씨.



◆“다시 돌아가도 밀양행”

수년 전 치기 어린 소년은 이제 없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 가득한 청년만이 있다. 청춘을 왜 이렇게 특별하게 쓰느냐는 우문에 특별하지 않다는 현답을 내놓는다.

“집회, 시위가 아닐 뿐이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일에 청춘을 쓰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의 자리를 직접 선택했을 뿐이죠.”

어진씨는 다시 열여덟 살로 돌아가도 또 밀양행을 택할 거라고.

“개인적으로 밀양의 싸움이 끝나면 이 상황을 버티게 해준 전국의 연대자들과 다시 만나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면 주민들 집을 친환경에너지 주택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거요. 밀양에서 초고압 송전탑이 필요없는 분산형 전원, 에너지 자립을 실현시키는 거죠.”

김현미 기자 hm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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