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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미투는 인간선언이다- 손상민(극작가)

기사입력 : 2018-03-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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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지역문화활동가 연수에서 만났다. 그는 우리 팀 팀장이었고, 연수 마지막 날 내가 몸담았던 조직의 사례를 주제로 한 PT를 발표했다. 덕분에 1등으로 뽑힌 우리 팀은 다음 해 4박6일 영국 연수를 다녀왔다.

넉살 좋고 배포가 큰 사람이었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극단적인 표현으로 사례 발표를 한 탓에 발표가 끝난 후 나의 항의를 듣기도 했다. 전주 유명 극단 대표를 지목한 미투운동 기사를 보다가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순간 멍했다. 피해 여성이 성추행을 당한 시기가 그와 알고 지낸 시기와 겹쳤다.

2016년 부산일보 희곡으로 등단한 내게 담당 기자가 심사위원인 이윤택 씨가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전했을 때 가슴이 우둔거렸다. 이 씨의 유명 작품들을 알고 있었고 밀양연극촌과 도요창작스튜디오, 연희단거리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기에 그로 인해 등단한 사실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수상 당일 그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의례적으로 심사위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쓰는 수상소감에 이 씨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게 못내 미안해서 기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터질 게 터졌다’고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인이 가해자였고 선망하던 이는 괴물이었다. 가까운 김해 지역 극단 번작이 대표는 구속당했다. 그 사이 부산의 한 극단에서 작품 의뢰를 받았지만 글을 쓸 수 없었다. 연극 속 인물들이 현실 속 피해자와 가해자로 오버랩됐다. 글 쓰는 이가 이럴진대 관객은 오죽할까. 예상대로 대학로에서는 티켓을 취소하는 관객이 줄을 잇고 공연장은 어느 때보다 썰렁하다고 전한다.

서지현 검사에게서 촉발된 미투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매일 아침 검색어 순위에 오른 이름을 설마 하는 심정으로 클릭한다.

미투운동 관련 기사를 득달같이 찾아보았더니 울분이 쌓이고 수시로 울컥한다. 너무도 상세한 정황 설명에 나 역시 피해자가 된 모양으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미투’. 나 또한 손쉽게 손목을 잡혔고 허벅지를 내주었다.

20대 초반 처음 입사한 제약회사의 술자리에서 모 대학병원 부원장은 자신의 딸과 내가 같은 또래라고 말하며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내게 가장 큰 고객이었던 한 병원 의사는 그의 아내가 친정에 간 날, 나를 불러내 식사를 하자고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퇴사를 고민하던 회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학원 수료 후 입사한 방송국 회식 자리에서도 주주쯤 되는 이가 강권하는 술을 마셔야 했고 허벅지를 잡혔다. 다음 날 사직서를 냈다.

피해자들의 고백에 수시로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그는 왕이었다’는 말이다. 가해자들의 왕 노릇을 보아 하니 <파리 대왕>이 떠오른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태평양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만들어내는 묵시록적 세계를 담았다. 나는 요사이 뉴스들에서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야만성을 드러낸 이 작품의 19금 버전을 본다. 사회 곳곳이 무인도이고 그 속에는 어김없이 ‘파리 대왕’이 있다.

발화(發話)는 계속되어야 한다. 여성은 해어화(解語花)가 아니므로. 미투는 인간선언에 다름 아니므로.

손상민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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