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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획] 워라밸로 바뀌는 직장 “회사 선택 시 일과 삶 균형 고려”

직장인 55.2% ‘워라밸 중요’ 응답

기사입력 : 2018-04-24 22:00:00

직장인 A(34)씨는 회사의 한 부서장이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경악했다. “출근시간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퇴근시간 30분 지나서 퇴근해야 근면성실한 거지.” 그래서 얼마나 업무 효율이 오르고 성과가 있었나?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지만 A씨는 참았다.

아직까지 이런 사람이 있구나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경직된 직장풍토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직장은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았다. 퇴근 후나 주말까지 일을 하거나 먼저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해 성과를 내는 직장인이 ‘본보기’였달까. 하지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이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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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 잡코리아가 직장인 1007명을 대상으로 한 ‘일과 삶의 균형’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회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건은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이라는 응답이 55.2%(복수응답)에 달했다. 연봉이나 승진에 치중했던 세대가 지자,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해 각자가 즐거운 활동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세대가 주류로 등장했다.

‘직장이 나의 전부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세대가 경제활동 인구로 부상하면서 직장도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양질의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출퇴근을 유연하게 조정하고, 직장 어린이집 등을 통해 육아 부담을 덜어주거나 근로시간 단축을 실천하려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워라밸’ 기조에 다수의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면’도 있다. 하지만 가시적인 측면에서라도 분명한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아이를 맡아줍시다

기업의 ‘워라밸’ 보장에 있어 첫 번째 선결 과제는 육아 지원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영유아보육법에 따르면 상시 근로자 500인 이상 또는 상시 여성 근로자 300인 이상을 두고 있는 기업·학교·지자체는 직장어린이집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 특히 2016년부터 설치의무 미이행 사업장에 연간 최대 2억원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되면서 설치율이 조금 늘었다.

하지만 매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하는 직장어린이집 설치 미이행 사업장 명단에는 도내 기업체, 학교 등 10여 곳이 꾸준하게 이름을 올린다. 어린이집 설치로 인해 발생할 비용을 지출하기보다는 이행강제금을 물겠다는 심사다. 또 ‘상시 근로자 500인 이상, 상시 여성 근로자 300인 이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중소기업 등은 영유아보육의 사각지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육 사각지대를 위해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공공 직장어린이집 설립 사례가 늘고 있다. 산업단지 내 기업체에 근무하는 근로자라면 이용할 수 있다. 창원국가산단도 지난해 산단형 공동직장 어린이집을 개원해 성황을 이뤘고, 근로자복지회관을 건설 중인 창원 봉암공단도 복지회관에 공동직장 어린이집 설치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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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집에 갑시다

특히 이들 직장인들이 ‘워라밸’의 중요 기준인 야근 실태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잡코리아가 실시한 ‘일과 삶의 균형’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7.5%는 1주일에 최소 1회 이상 야근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들의 1주일 평균 야근 일수는 2.9일로 조사됐다. 근무하는 기업형태별로 중소기업 근로자의 69.5%가 야근을 한다고 답해 가장 높았으며, 이어 대기업(63.9%), 외국계기업(55.2%), 공기업(47.6%) 순이었다. 야근을 많이 할수록, 즉 중소기업, 대기업, 외국계기업, 공기업 사원 순으로 ‘워라밸 정도가 낮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최근 주당 근로시간을 줄여 워라밸을 확보하려는 기업들도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주 최대 52시간 근로문화를 시범운영 중이다.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을 초과하면 임원에게 경고하고 전산시스템을 통해 자동으로 근로시간을 관리한다. 신세계그룹은 올해 들어 주당 35시간 노동이라는 파격 실험을 이행 중이다. 오후 5시 퇴근을 위해 5시 30분에 PC가 자동으로 꺼지고 야근이 잦은 부서를 공개해 부서장에게 불이익을 준다.

도내에서는 BNK경남은행이 지난 19일 의미있는 노사협약을 맺었다. 노사 공동으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4대 테마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

협력 세부 내용은 △‘가족이 있는 저녁’을 위해 퇴근·야근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가족 문화행사 신설 △‘휴식에서 움트는 열정’이 만개하도록 휴가제도 개선, 해외선진체험 연수 추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일터’를 위한 찾아가는 건강 컨설팅제도 도입 △‘내일이 있는 삶’ 설계를 위해 임금피크제도 개선,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 등이다.

BNK경남은행은 2년 전부터 오후 7시면 PC 전원이 꺼지는 ‘PC-OFF’를 시행 중에 있다. 오후 6시 30분에 퇴근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퇴근송’이 나오고, 오후 7시면 PC의 전원이 꺼진다.

BNK경남은행 관계자는 “10여년 전만 해도 10~11시까지 야근은 보통이었고, 이러한 직장풍토 속에서 칼퇴근 문화가 정착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며 “현재는 일과 이후에 PC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사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주기 위한 자체적인 개선책이 강화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근로시간도 줄입시다

한국인은 ‘일을 많이 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2016년 기준 한국 근로자들은 1인당 연평균 2069시간을 일했다. OECD 35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긴 근로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지난 2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을 시작으로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연장근로시간 12시간, 휴일근로시간 16시간이 각각 가능했지만, 7월부터는 연장근로와 휴일근로 개념이 합쳐져 총 12시간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력 충원이 비교적 쉬운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에게 근로시간 단축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법 개정으로 인해 기업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연간 12조3000억원에 달하며, 이 중 70%에 달하는 8조6000억원이 300인 미만 중소사업장이 떠안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내 한 영세기업 대표는 “워라밸도 좋지만 이로 인해 근로 양극화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본다. 영세업자들은 지금도 인력난으로 가족들을 사업장으로 불러내어 겨우겨우 납품일자를 맞추는데, 근로자의 눈높이를 맞추기란 사실상 어렵다”며 “큰 틀에서는 워라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이에 다가서기 위한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 근로시간 단축하는 중소·영세기업에 대한 정부사업 지원 우대, 사회보험료 감면 등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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