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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남재우(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사입력 : 2018-04-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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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현기영은 말했다. “해마다 1200만명 이상 제주 여행을 다녀가지만 이 아름다운 섬에 한때 2만5000~3만명에 이르는 이들이 국가폭력에 몰살당한 상처가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70주년 4·3을 추념하는 슬로건은 이것이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1945년 8·15해방은 우리에게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민주사회 실현이라는 과제를 던졌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으로 대체됐고, 남한만의 5·10총선거는 분단을 의미했다. 저항은 거셌고, ‘단독선거반대’ 구호는 계속됐다. 제주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기마경찰은 아이를 치었고, 항의하는 군중에게 경찰은 발포했고, 6명이나 죽었다. 제주에서는 대규모 민관 합동 총파업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지사와 군정 수뇌부들을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육지의 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투입했다.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았으며, 경찰은 구금자들을 고문했다. 이렇게 이미 4·3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3일 새벽,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마다 봉화가 올랐다. 진압은 잔인했다. 아름답던 꽃들이 툭, 통꽃으로 떨어져 땅에 나뒹굴었다. 제주의 동백꽃처럼…. 시인 이산하는 그의 시에 이렇게 적었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주지구 미군 책임자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라고 했다.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라 외쳤던 제주의 5·10총선거가 무효가 되면서 진압 강도는 높아졌다.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은 최대의 학살터였다. 2007~2009년 1차 발굴 때 382구의 유해가 나왔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마을, 130여 호가 살던 마을, 터만 남았다. 동광리에서만 166명이 희생됐다. 대부분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들이었다. 동광마을 같은 사연을 지닌 마을이 제주에는 100곳이 넘는다. 조천읍 북촌리에서도 주민 400명이 하루 이틀 사이에 학살됐다. 현기영은 이 마을을 모티브로 1978년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했다.

이제 4·3은 치유돼야 한다. 70년이나 지났다. 당시를 직접 겪은 생존 피해자가 살아서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10주기다.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을 규정하는 4·3특별법 개정안은 입법돼야 한다. 추가 진상조사, 가해자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전쟁이 아니었는데도,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3만여 명이 학살된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 말했던 사람은 제주지구 진압작전 미군사령관이었다. 지난 7일 광화문광장에서 제주4·3유족회 등은 4·3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식 사과와 4·3 당시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역할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미국정부는 답해야 한다.

한국현대사에서 4·3도 자리매김돼야 한다. 4·3은 국가폭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의 의미도 있지만, 왜 국가폭력이 제주도민을 희생시켰는지, 왜 제주도민은 저항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4·3의 요구는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 반대’, ‘온전한 통일독립’ ‘공권력의 탄압 중단’이었다. 그들은 분단된 조국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항했다.

4·3을 좌익 무장폭동으로, 추념식을 남로당 좌익폭동에 의해 희생된 제주 양민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 규정해서는 안 된다. ‘제주 4·3 70주년 경남 창원분향소’가 누군가에 의해 처참하게 훼손된 것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행위이다.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대통령 추념사의 한 구절이다. 이제는 제주에 온전한 봄이 와야 한다. ‘온전한 통일독립’이 그들이 원했던 봄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남재우(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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