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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소확행까지- 이경옥(경남여성단체연합 여성정책센터장)

기사입력 : 2018-05-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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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다’라고 바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새해인사나 연하장이나 카드에 덕담을 얘기하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행복하세요’라고 글을 쓰거나 말을 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늘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 같은 행복 염려증(?) 속에서 살고 있다. 행복에 예속돼 행복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우울한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제도, 조직, 기업, 책, 언론 등에서 행복을 추구하라고 또는 행복 추구가 삶의 목표인 것처럼 온통 행복론에 둘러싸여 있다. 기업은 행복 마케팅으로 모든 상품들을 광고하고 있다. 좋은 직장,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큰 평수 아파트에 살고, 문화생활도 하면서 살아야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집, 직장, 꿈들을 실현하기 힘든 젊은 층의 행복 트렌드는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한다고 한다. 큰 것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실현 가능성도 낮으므로 지금 작고 소소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는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행복은 공리주의 행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공리주의 행복이란 행복(happiness)하려면 첫째, 쾌락이 증가하거나 고통이 감소하거나 둘째, 쾌락은 변동 없거나 고통이 감소하거나 셋째, 쾌락이 증가하거나 고통은 변동 없거나이다. 이처럼 벤담의 공리주의적 행복 개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익숙해져 있다. 이는 계산적이고, 환원적인 행복론으로 볼 수 있다. 기쁨과 고통의 증감만이 인간의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행복은 공리주의 행복처럼 일률적이고 범주화돼 있지 않다.

행복에 대해 사람마다 경험과 다양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기쁨과 고통 두 가지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 존재의 몫을 다하기 위한 고통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화로운 상태가 행복하다. 주변의 다른 사람이 고통받거나 차별받으면 행복하지 않고 불편하다. 무엇이 행복이며,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해 보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벤담의 사상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공리주의이며 공공의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은 나중이라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은 ‘정의의 관점’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거나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 인권은 ‘나중에’라는 공리주의는 이제 시효가 끝났다. 자기 삶의 주권자로서 공적영역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고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돼야 한다. 즉, 계산적이고 일률적인 공리주의 행복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의 몫을 찾는 삶은 어떨까! 이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소득’ 보장이 돼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지 않고, (성)폭력당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배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 세상을 위해 여성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좀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가 행복이며 나의 존재가치를 다하는 것이다.

이경옥 (경남여성단체연합 여성정책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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