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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진해의 벚꽃과 러일전쟁- 이경민(진해희망의집 원장)

기사입력 : 2018-05-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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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 진해의 벚꽃이 만발했다. 매년 군항제의 벚꽃축제에 전국적인 인파가 모여 봄의 향취를 즐긴다. 특히 벚꽃축제가 한참인 거리의 중심에 진해근대역사거리가 만들어졌고, 이는 우리에게 진해의 탄생 배경과 벚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진해는 1년간의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이 건설한 도시이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1904년 2월 6일 인천과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먼저 기습 공격하고, 1904년 2월 10일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전쟁의 결말은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러시아태평양함대(발틱함대)와 일본연합함대가 결전하여 다음 날 28일에 세계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대비해서 1905년 2월부터 연합함대사령관 도고 제독의 지휘 하에 거제도 근해의 진해만 앞바다에서 3개월간의 비밀 실전훈련을 통해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일본의 승전 결과로, 대륙의 러시아는 퇴진하고, 일본은 드디어 한반도를 거점으로 본격적인 북진전략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결과로서 진해는 일본의 북진전략을 위한 군항도시로서 탄생된다.

일본은 도시 건설을 위해 1905년부터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 1910년 4월에 본격적인 군항건설 작업을 시작했고, 1923년경에 군항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1929년 5월 27일, 일본의 승전 제25회 기념일에 지금의 제황산 공원의 정상에 대한해협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의 격파를 기념하는 거대한 ‘일본해 해전 기념탑’을 건립했다.

진해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전략을 위해서 이용당한 도시이다. 창원대 허정도 초빙교수는 일본이 건설한 도시, 진해를 ‘뺏은 자의 도시’, 일본의 도시 건설로부터 내쫓긴 한국인들이 거주했던 격리구역(지금의 경화동)을 ‘빼앗긴 자의 도시’라고 설명한다. 진해는 극동지역의 세계사적 배경에서 태어난 비운(悲運)의 도시이다. 우리는 그때 꽃피운 벚꽃을 지금까지 군항의 축제로서 즐긴다. 진해의 벚꽃축제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를 알자는 것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다. 진해는 일본의 군항건설이 없었다면 없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19세기 철학자, W. 딜타이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고 규정한다. 이 뜻은 인간은 시간성의 존재로서 과거와의 연관 속에 있고, 과거는 현재에 ‘의미’로서 우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진해는 일본이 한반도 침략 전략을 위해 건설한 도시이고, 우리에게는 비운의 의미로서 존재한다.

미국의 어느 흑인 해설사가 미국 개척사에서 백인의 인디언 대량 학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역사는 좋은 역사이든 불행의 역사이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역사’라고 당당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역사는 좋은 것이든 불행이든 모두를 인지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한반도는 극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대륙의 남진세력과 태평양의 북진세력이 만나는 곳이다. 그 세력들 간의 충돌 중 하나가 러일전쟁이다. 그 만남에서 태어난 도시가 진해이다. 우리는 진해를 극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연관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아니, 한반도 전체가 그러한 연관 속에 있다. 진해의 벚꽃은 극동아시아의 세계사 속에서 피어난 꽃이고, 극동의 세계가 없다면 없었다.

한반도가 속한 극동아시아의 역사적 세계의 환경은 지금에도 변한 것은 없다. 임진왜란 때 진해지역에 웅천과 안골왜성이 축성된 이후 300여 년이 지나 일본에 의해 진해의 군항도시가 만들어졌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다. 100여 년 전에 진해가 탄생할 때나 역사적 환경은 똑같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해의 벚꽃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한반도의 미래에 벚꽃 외에 또다시 어떤 꽃이 필지 우리는 어찌 알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

이경민 (진해희망의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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