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작가칼럼] 누가 나무를 심었을까- 조재영(시인)

기사입력 : 2018-08-03 07:00:00
메인이미지

황량한 산을 여행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황무지 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묵묵히 나무를 심는 노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다. 이곳에 나무를 심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주인공은 노인이 하고 있는 일이 덧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그 산은 노인의 소유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1953년에 발표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면, 황무지는 맑은 공기와 물이 있는 울창한 숲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살아가면서 엘제아르 부피에와 같이 씨앗을 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면 문풍지에 아침 햇살이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감화를 받는다. 나는 원래 식물 키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자연에 관한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전문가처럼 출사를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식물 키우기는 정성이 필요했다. 나는 살기에 바빴고 여유가 없었다.

나의 관심사가 바뀐 것은 일상의 작은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일하던 학교의 공동 연구실에서 선생님 한 분이 다양한 식물들을 가지고 오셨다. 너무 연구실이 적막하다는 것을 아셨던 탓이었을까. 확실히 식물들이 들어오자 연구실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길가의 꽃들, 집에서 키우던 나무 잎사귀,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잡초에 가까운 식물들. 그분은 지칠 줄 모르고 그것들을 풍성하게 물컵에 담아 두거나 작은 화분에 심어 두셨다. 때로는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잎사귀들도 있었다. 꽃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다. 선량한 사람이 선량한 마음으로 나누는 즐거움이었기에 아주 특별했다.

그래서일까. 나도 점점 그 특별함에 빠져들었고, 얼마 뒤 그분이 자리를 비우자 식물들을 키우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화병의 물을 갈아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눈길을 주며 상태를 관찰했다. 사실 관찰했다기보다는 눈길이 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그러다 보니 미세한 변화를 통해서도 식물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교감을 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이렇게 자라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키운 식물들을 보며 종종 감탄을 하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물과 햇볕과 흙의 조합으로 생명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감탄은 고스란히 그들보다 먼저 나의 몫이다.

“정말 예쁘군요.”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럼, 가지시든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하며 선물을 한다. 무엇인가를 받는 즐거움도 크지만 주는 즐거움도 그 못지않다.

“잘 가거라. 새 주인에게서 이쁨 많이 받고~.”

재활용품을 이용한 작은 화분을 받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환한 미소는 분명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선물이다.

푹푹 찌는 불볕더위가 계속된다. 그리고 무더위보다 더한 경악할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더위, 쉽게 깊이를 잴 수 없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푸르고 시원한 정을 나누었으면 한다.

조재영 (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