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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작은 쓸모에 빠져 큰 쓸모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기사입력 : 2018-08-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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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용 作 ‘무제’


일자리에 관해서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구직자와 기업 간에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점도 있어 보인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기업들은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한다. 기업들이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할 때, 그 내용은 대개 대학에서 가르친 것들이 현장에서 바로 적용하는 데에 별로 쓸모가 없어서 기업에서는 새로 다 가르쳐야 한다는 하소연이다. 기업은 항상 쓸모 있는 것들을 요구해왔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면에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때라면, 쓸모 있는 것에 관한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 그 요구는 더 급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는 쓸모 있는 것이라는 말을 채워주는 내용의 변화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진다. 이런 쓸모 있는 것에서 저런 쓸모 있는 것으로의 이동이 변화의 실제 모습이다. 여기서는 쓸모 있던 것이 저기서는 쓸모가 없거나 줄어든다. 똑같이 저기서 쓸모 있던 것들이 여기서는 쓸모가 확 줄거나 아예 없다. 쓸모없던 것이 쓸모 있어지거나 쓸모 있던 것이 쓸모 없어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 대응하는 것도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이런 선견지명을 효율적으로 잘 발휘한 사람들이 항상 부나 권력을 차지했다. 학술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성공도 이런 선견지명과 매우 가깝다.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자리 잡기 전에는 쓸모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어쩔 때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장자』라는 책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한다. ‘나한테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 합니다. 줄기는 하도 울퉁불퉁해서 먹줄을 치지 못하고, 가지는 하도 꼬여서 자를 대지 못합니다.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다 크지만 쓸모가 없어 사람들이 외면하니 처지가 이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너구리나 살쾡이를 아시죠. 몸을 낮게 웅크려 닭이나 쥐를 노리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뛰다가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지요. 그런데, 큰 검은 소는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처럼 커서 큰일은 해도 쥐는 잡지 못합니다. 선생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모가 없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심어 놓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롭게 쉬면서, 그 그늘 아래에 누워 유유자적 해보지 않소.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것이오. 쓸모없다고 해서 어찌 괴로워한단 말이오.’ 얼핏 읽으면 쓸모없게 사는 것이 차라리 해를 입지도 않고 오래 갈 뿐만 아니라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보이기도 하다. 그냥 편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낭만적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장자가 말할 때, 유유자적하고 장수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최고 단계의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쓸모없음을 비판할 때 ‘먹줄을 치지 못하고’ ‘자를 갖다 대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먹줄은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선을 긋는 데 사용하고, 자는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데에 사용한다. 재단하고 길이를 재기 위해서는 이 먹줄과 자를 피할 수 없다.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기준이다. 만들어지는 어떤 것도 이 먹줄과 자의 지배력 아래서 생산된다. 먹줄과 자는 지배적인 능력을 가지고 군림한다.

문제는 세상이 먹줄과 자처럼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또 거기서 미래를 지향하는 영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할 수 있다. 기준은 그대로지만 세상은 변한다. 변화는 항상 먹줄과 자의 범위를 벗어난다. 먹줄이나 자가 변화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화에 따라 오히려 먹줄과 자의 쓰임새가 달라져야 한다. 변화에 맞춰 먹줄이나 자의 쓰임새가 습관적 사용법을 벗어나야 한다면, 아직 먹줄이나 자의 접근로가 개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쓸모없는 것이라는 평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적으로 아직 펼쳐지지 않은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선의 높이나 역할의 대소에 따라 수준이 아직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또 필요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의 얘기가 바로 그러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라는 곳에 당도하여 토지신을 모시는 상수리나무의 사당을 보았다. 얼마나 큰지 수천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며,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며, 여든 자쯤 되는 데서 가지가 나와 있었다. 그 가지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수십 개나 됐다. 그 나무 둘레에 구경꾼이 장터처럼 모여 있으나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제자가 나무를 지켜보다가 장석에게 달려와 물었다. ‘저는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니게 된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버리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대답했다. ‘그런 소리 말게. 그것은 쓸모없는 나무야.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금방 썩으며, 기물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기지. 그러니 저건 재목이 못되는 나무야. 아무 쓸모없으니까. 저처럼 오래 살 수 있었지.’ 장석이 집에 돌아왔는데, 상수리나무 사당의 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너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느냐. 너는 나를 쓸모 있는 나무에 비교하려는 거냐. 대체 아가위, 배, 귤, 유자 따위 열매들은 익으면 잡아 뜯기고, 뜯기면 가지가 부러진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당겨 찢긴다. 이는 그 초목이 맛있는 열매를 맺기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 지는 것이다. 그래서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즉 스스로 세속의 타격을 받은 자이다. 세상의 사물이란 다 이와 같다. 또한 나는 쓸모 있는 데가 없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죽을 뻔 했으나 오늘 자네가 쓸모없다고 했기 때문에 비로소 뜻을 이룬 셈이다. 쓸모없음이 내 큰 쓸모가 되었다. 가령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

쓸모없음으로 큰 쓸모를 완성하는 기묘한 방식을 말해준다. 배, 귤, 유자 등은 특정한 맛을 잘 내서 매우 쓸모 있는 것으로 환영받는 과일들이다. 이런 특정한 능력, 즉 기능에 갇힌 단계에서 보면 상수리나무는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상수리나무는 천명(天命)을 실현한다. 즉 우주의 질서를 구현하거나, 시대의 소명을 구현하는 정도다. 너구리나 살쾡이는 닭이나 쥐를 잡는 기능으로 매우 의기양양 하지만, 소는 하늘을 드리우는 구름같이 거대한 일을 한다. 너구리나 살쾡이의 시각에서 보면, 큰 소는 그저 덩치만 클 뿐 아무 쓸모가 없다. 닭이나 쥐를 잡아서 배불리 먹기만 하면 충분한데, 하늘에 구름을 드리우는 큰 일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보는 것이다.

기능에 빠져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 기능을 넘어서 있으면서 기능을 지배하는 더 높은 단계의 비전이나 꿈을 그냥 장식처럼 다루거나 심지어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성적을 특히 중시하는 교육에서는 성적만 좋으면 된다. 운동을 안 해도 되고, 심부름을 안 해도 되고, 부모가 모든 것을 대신 해줘도 되고,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학업 내용과 관련 없는 독서는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성적이라는 기능적 성취만 중요하지 상위의 지배력 있는 가치는 쓸모없을 뿐이다. 성적을 높여서 대학에 가기만 하면 되지, 꿈같은 것을 꿔서는 오히려 안 된다. 그러나 꿈이 없이 닦은 기능적 학업은 한계가 분명하다. 쓸모 있음에 갇혀서 쓸모없음을 지향하는 동력을 상실하면 새로운 도전이나 높은 상승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꿈을 가진 사람이 꿈 없이 기능만 행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루는 것을 많이 봐왔다.

사실 지적 성장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아직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향한 부단한 도전에 다름 아니다. 쓸모 있음에 갇혀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대답’만 할 줄 알고, 쓸모없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질문’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따라 하기라는 기능적 활동을 잘해서 발전했다. 쓸모 있는 것을 잘 수행해 온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목표를 세워 추구할 줄은 잘 알지만, 목적을 추구하는 훈련은 돼 있지 않다. 방송국은 시청률만 추구하다가 방송의 본질을 세우지 못하고, 고등학교는 대입 진학률만을 따지다가 교육의 본질을 놓치며, 대학은 취업률에 갇혀서 대학으로서의 본질을 포기한다. 방송국에는 시청률 너머에 방송국으로서의 목적이 있을 것이고, 고등학교에는 진학률 너머에 고등학교로서의 목적이 있으며, 대학에는 취업률 이상의 목적이 있을 것임에도 지금은 모두 시청률이나 진학률이나 취업률과 같은 기능적인 목표에만 빠져 있다. 작은 쓸모에 빠져 쓸모없게 보이는 큰 쓸모를 놓친 형국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렇지 않은가?

우리는 쓸모 있는 것을 이루는 것으로는 가장 잘한 민족이다. 이제 쓸모없음을 향하는 도전의 길이 남았다. 목표 수행 능력은 아주 높다. 이제 목적을 세워보는 것이다. 쓸모없음으로 쓸모 있음에게 길을 내줘야 한다. 기업도 쓸모 있는 인재만을 구하는 일을 넘어서서 쓸모없음을 향할 줄 알아야 한다. 깨달은 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서 왕복 운동 한다.

(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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