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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선시(朝鮮詩) 선언 - 변종현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기사입력 : 2018-08-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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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시를 쓰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71세 때 한 선언이다. 다산은 윤휴, 유형원에게서 영향을 받은 남인 학자로 무너져 가는 조선왕조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한 실학자였다. 조정에 출사하기 전부터 매형인 이승훈에게 ‘천주실의’를 빌려 읽었고,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정조의 명을 받고 거중기(擧重機)를 설계해, 화성 축조를 2년 6개월 만에 완성하기도 했다. 정조 사후에 천주교 신앙 혐의로 장기,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저술했다. 특히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대부분 집필활동이 이루어졌다. ‘경세유표’는 국가 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를 서술했고,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안과 본받아야 할 것을 체계적으로 서술했고, ‘흠흠신서’는 죄인을 처벌할 때 유의해야 할 점과 법을 적용할 때의 마음가짐 등을 제시했다. 강진에 있는 동안 세금 수탈에 시달린 백성이 자신의 남근을 낫으로 자른 참상을 ‘애절양(哀絶陽 남근을 자른 것을 애도함)’이란 장편의 시로 고발하기도 했다. 다산은 1801년 초봄에 귀양을 간 포항 장기에서 10수의 한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다산은 ‘조선시(朝鮮詩)’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 5장을 살펴보자.



鷄子新生小似拳(계자신생소사권)

갓 태어난 병아리들 작기가 주먹만 한데

嫩黃毛色絶堪憐(연황모색절감련)

연노란색 털빛이 아주 깜찍하게 어여쁘네.

誰言弱女虛祿(수언약여미허록)

어린 딸이 공밥 먹는다고 누가 말하나?

堅坐中庭看鳶(견좌중정간혁연)

꼼짝 않고 뜰 가운데 앉아 성난 솔개 지켜보는데



갓 태어난 병아리들 작기가 주먹만 한데, 연노란색 털빛이 아주 깜찍하고 어여쁘다. 늘 공밥을 먹는다는 어린 딸은 꼼짝 않고 뜰 가운데 앉아 병아리 잡아채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성난 솔개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밖에도 ‘보릿고개(麥嶺)’에 풋보리죽을 먹으면서 봄철을 힘겹게 넘기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 봄철 농가에서 새 며느리가 모시적삼을 장롱 속에 곱게 간직해 두고 추석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 그리고 수박을 심으면 아전들이 찾아와 시비를 걸까 봐 호박을 심었더니 밤 사이에 덩굴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는 정경 등을 실감나게 노래했다. 이처럼 다산은 조선 사람이 조선시를 쓰고, 백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법 제도가 바르게 시행되고, 목민관들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꿈꾸면서 살았던 것 같다.

변종현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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