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사람속으로] 거제서 10년째 독서동아리 운영 정귀숙 시인

더 나은 사회 꿈꾸며 ‘인문 씨앗’ 키워요

기사입력 : 2018-09-06 22:00:00

폭염이 머리를 짓누르던 여름은 어느새 가고 가을 하늘이 파랗게 높아졌다. 더위가 물러간 자리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물리적 공간이든 마음의 여유든 빈자리가 생기면 허전함도 뒤따라 오는 법. 온갖 매체에서 가을은 독서의 달이라고, 가을의 허전함을 책이 주는 양식으로 채우자고 이야기하지만 독서가 쉽지만은 않다.

정귀숙(48)씨는 지난 10년 동안 거제에서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며 삶의 많은 부분을 책으로 채우고 있다. 정씨는 독서동아리 운영을 계기로 인문학을 탐독하고 이를 거름 삼아 지난해에는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또 박물관 학예연구원, 학생상담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정씨에게 어떻게 가을을 책과 함께 즐길 수 있는지, 독서모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책이야기를 들어봤다.

메인이미지
10년째 독서동아리 ‘책벌레’를 운영하고 있는 정귀숙씨가 거제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생화학 연구원에서 독서광이 되기까지

정씨는 인문학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이과 출신이다. 부산대학교 화학과에서 생화학 석사로 졸업 후 1995년 울산에 있는 중견기업 연구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신물질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아 6년간 연구실에서 각종 실험을 진행하는 전문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만 해도 연구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실과 산업단지에는 각종 약품 냄새가 났다. 아기를 임신했던 정씨는 2세를 위해 자신의 청춘이 담긴 연구원이라는 직업을 내려놓는 힘겨운 결정을 했다.

정씨는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석사까지 공부해 얻었던 직업을 그만둔다는 게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며 “울산의 다른 기업으로 옮기는 것도 고려했지만 가족이 흩어지는 것이 싫어 남편의 직장이 있는 거제로 왔다”고 했다.

남편의 직장이 있다는 것 빼면 아무런 연고가 없던 거제의 생활이 정씨에게는 쉽지 않았다. 특히 육아에 관련한 정보를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이런 ‘독박육아’의 힘듦을 조금이나마 줄여준 곳이 도서관이었다. 정씨는 책에 모든 정보가 다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독서에 몰두했다.

◆아이 잘 키우고 싶어 시작한 독서동아리

정씨가 독서동아리를 시작한 계기는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다. 2004년 거제도서관 유아 책읽어주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자녀독서지도’ 강좌에 참여한 정씨는 아이가 책 읽어 주는 것을 좋아하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당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선생님의 추천으로 독서지도사 자격증 준비를 하게 되고, 함께 수업을 들었던 회원들과 자격증 취득에 성공했다. 정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회원 8명이 주축이 돼 독서동아리 ‘책벌레’를 2008년 11월에 만들었다.

정씨는 “아기를 책을 잘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독서 프로그램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엄마들이 모이게 됐다”며 “이 엄마들이 모여 시작한 독서동아리는 처음엔 육아정보 나눔의 장으로 시작해 점점 발전하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메인이미지
6일 거제YWCA 작은도서관에서 책벌레 독서동아리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정귀숙씨 제공/


◆독서동아리, 구성원 특성에 맞게 꾸려야

독서동아리 초기에는 주로 그림책과 육아 관련 서적을 읽고 엄마들의 육아 후기를 공유하는 자리로 운영됐다. 모임은 주 1회 책 한 권을 읽고 아이의 반응을 서로 이야기하고 다른 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8명으로 시작한 독서동아리는 10년이 지나며 현재 11명이 참가하고 있고 창단멤버 중 4명은 아직도 책을 같이 읽고 있다.

정씨가 10년간 독서모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특성화’였다. 책벌레 독서동아리의 회원들이 느끼기엔 독서모임은 하나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거제 지역 특성상 독서동아리에 참여한 대부분의 여성 회원들이 남편의 직장을 따라 거제에 정착해 살고 있던 터라 연고가 없었다. 그들은 독서동아리를 통해 소통하고 삶을 공유하며 더욱 돈독한 관계가 됐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독서동아리도 성장해 지금은 문학, 철학, 역사, 경제를 아우르는 다방면의 책을 읽고 있다. 이렇게 독서 범위를 넓히고 읽은 책만 100권이 넘었다.

정씨는 “오히려 거제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끼리 만났다는 것이 더 큰 유대감을 만들어준 것 같다”며 “지금은 회원들이 친구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많이 큰 지금은 독서모임이 우리를 돌아보고 사회도 알아가는 인문학적 담론을 나누는 터가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독서 왜, 어떻게 하나?

정씨가 말하는 책 읽는 이유는 삶과 사회와 역사를 알고 싶어서다. 이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도 영화와 비슷하게 책도 읽게 되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람들 마음이다. 정씨는 이럴 때 독서모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씨는 “독서는 하고 싶은데 독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혼자 독서를 하는 경우엔 한 가지 분야만 편식하게 되고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며 “대부분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 독서모임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 또 “자기가 책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며 “지역 각 도서관에는 대부분 독서모임이 만들어져 있으니 얼마든지 도서관을 통해 이런 독서 욕구 해소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메인이미지
지난 5일 거제도서관 책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귀숙씨.



◆독서로 바뀐 삶

책을 많이 읽으면서 정씨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정씨는 독서를 밑거름 삼아 취미로 써 오던 시 공부를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학부모 문학대학·거제문협 시 창작 수업·눌산문예창작교실 등 수업을 듣고 지난해 종합문예지 문장21의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캘리그래피를 시 창작 작업에 병행하는 시도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2017년 거제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하며 학생 교재 집필과 역사자료 제작 활동을 했다. 또 2014년부터 3년간 교육청 주관으로 진행되는 학생상담사 활동을 했고, 지금은 거제YWCA 성폭력 예방 양성평등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씨는 “독서를 통해 심리·과학·철학·4차 산업혁명 등 다방면으로 관심이 확장됐다”며 “앞으로 시집 1000권 읽기, 책벌레 독서동아리 문학기행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지역에는 인문학적 싹이 아직 날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이런 와중에 책에서 얻은 것들이 나 자신을 바꾸는 것처럼 독서모임 회원들도 바꾸고 또 이것이 전파가 돼 인문학이 성장할 수 있는 씨앗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글·사진= 조규홍 기자 hong@knnews.co.kr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조규홍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