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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부마민주항쟁 39주년, 그날의 함성 되새기다 (상) 시민·학생 함께 유신정권 맞서

경남대서 시작된 학생시위 ‘1만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부산서 촉발된 시위, 마산으로 확산

기사입력 : 2018-10-15 22:00:00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의 뒤틀린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국민들의 함성이 1960년 4·19혁명에서 시작해 1987년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과정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유신 독재정권 아래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유일의 대규모 시민항쟁이었고, 이러한 저항정신은 이 지역 주민들을 지난 2016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어난 촛불혁명의 대열로 이끌기도 했다.

이처럼 부마항쟁은 오늘날에도 창원시민들의 가슴속에 숨쉬는 저항정신이지만, 현재까지 국가기념일조차 지정되지 않고 진상규명도 완료되지 못하는 등 그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부마항쟁 39주년을 맞아 항쟁의 그날을 되짚으며 의의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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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경남신문 DB/



◆먼저 나선 학생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교내 시위에서 시작된 항쟁은 다음날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확산됐다. 걷잡을 수 없는 시위에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국가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통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체포작전을 진행했다.

부산의 시위 소식이 마산의 경남대에 전해지면서 학내가 술렁였고, 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전면투쟁을 선언하면서 대규모 항쟁에 불이 붙었다. 긴장감이 감돌던 이날 오후 2시 15분께 학교 측이 교내방송을 통해 ‘무기한 휴교, 시험 안 친다’며 학생들의 귀가를 종용하자 학생들은 이에 반발, 도서관 주위로 1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의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피를 흘리고 있다. 3·15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 나가자”는 당시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60)씨의 외침에 동조한 학생들은 ‘민주회복’, ‘독재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교문 앞에서 가로막힌 학생들은 ‘오후 5시에 3·15의거탑에서 재집결하자’는 누군가의 외침에 흩어져 마산시내로 진출했다.

정씨는 “사복경찰과 교수들이 학생들을 감시하고 설득했지만, 학생들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동연설을 할 수도 없었다. 연좌제 하에서 공개적으로 나서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며 “그런데 우리 과 1학년들이 (도서관의) 옥상에서 뭘 하려고 했는데 저러면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과 선배의 설득에 앞장서 선동연설을 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1만여명이 운집한 시민항쟁= 하지만 3·15의거탑 주위의 철길, 문화방송국 앞, 시외버스 주차장 근처에서 산발적으로 모인 수백명의 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시위를 주도한 학생 6명이 붙잡히면서 마산 창동, 남성동, 부림동 등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후 사복경찰들이 시위대 속에서 이를 분산시키고 최루탄을 쏘는 와중에 시위 경험이 적은 학생들이 경찰의 제지로 대열이 쉽게 무너지는 등 단결이 되지 않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퇴근 시간 이후 많은 마산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시위 열기가 되살아났다.

마산시 중심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 번화가에는 1만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 시가지를 가득 채웠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시민들은 경찰이 난폭한 진압에 나서자 더욱 격렬하게 맞섰으며, 당시 공화당 경남지부 사무실이 있는 용마맨션을 향해 무수한 돌멩이를 날렸다. 군중들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뽑아 집기와 서류, 현판에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계속된 시위는 이틀 동안 이어졌고, 다급해진 정부는 20일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해 공수부대와 39사단 병력을 동원해 시민들을 강경진압하면서 무차별 구타하고 폭행했다.

최근 부마항쟁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위수령 발령 전 마산지역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배속돼 있던 제1공수특전여단 제2대대 소속 병력 235명을 투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허진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은 “시내로 확산된 시위에서 주도 학생들이 대다수 경찰에 붙잡혔고 시내에서의 항쟁은 누가 주동자인지 따질 게 없었다. 단시간 내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고 합세한 이유는 이미 유신정권 하에 쌓이고 억눌렸던 저항심이 표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며 “부산지역에 국한된 항쟁으로 그칠 수도 있었던 항쟁이 마산시민들의 저항심으로 더욱 확산돼 당시 시민항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항쟁으로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적폐와 모순에 대해 시민들의 저항의 목소리에 녹아 있다”고 평가했다.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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