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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부마민주항쟁 39주년, 그날의 함성 되새기다 (중) 유일한 사망자 유치준씨의 그날

격렬 시위 속 10여일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옛 경남모직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다

기사입력 : 2018-10-17 07:00:00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학생과 일반시민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항쟁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으면서도 희생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그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부마항쟁 당시 경찰 과잉 진압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 유치준씨에 대한 진상규명은 유족의 한을 풀어주는 동시에 항쟁의 위상을 높이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학계와 관련단체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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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조사관들이 16일 창원대학교에서 부마민주항쟁 당시 현장을 취재한 남부희(오른쪽) 전 경남신문 사회부장, 성재효(왼쪽 두 번째) 사회부 기자와 함께 고 유치준씨 사망과 관련한 면담을 하고 있다.

◆그날 유치준씨에게 무슨 일이?= 부산에 이어 마산으로 항쟁이 확산된 1979년 10월 18일 당시 51세였던 유씨는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후문 인근 옛 경남모직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씨는 이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10여일이 지난 11월 3일에서야 싸늘한 주검이 돼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유씨의 시신은 당시 마산시 성호동 서원곡의 한 야산에 가매장돼 있었다.

유씨는 당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새한자동차(현 용마동창회관) 앞 도로변에서 숨졌다. 경남신문(당시 경남매일)의 취재기록이 바탕이 된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 유씨 제적등본, 검시사건부 등 3개 문건 모두 같은 사망장소를 기록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이 장소는 저녁에 수출자유지역 정문 인근으로 관련 종사자들이 대거 퇴근하면서 당시 3·15의거탑 등 산발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던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한 지점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인근에 있는 공화당사에도 많은 시민들이 몰려가 돌을 던지는 등 시위가 격렬히 벌어지기도 했다.

기념자료집에는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당시 마산에서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과 군인은 시위를 하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시민을 구분할 수 없어 현장에서 붙잡히면 무조건 시위대로 간주해 폭행하고 연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전투경찰이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쳐 실신하거나 상처가 생긴 시민들도 다수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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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치준씨 검시사건부./유족/

◆왜 사망자로 인정되지 않았나?= 하지만 첫 진상보고서를 낸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인정할 객관적 자료가 없었다’며 유씨를 부마민주항쟁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위원회가 찾아낸 ‘검시사건부’에는 사인이 ‘뇌출혈사(지주막하출혈)’로 기재돼 있지만, 그 원인이 외부 충격 때문인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단정짓기 어렵고 이를 작성한 담당검사는 물론 당시 경찰들이 관련 사안에 대해 ‘모른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또한 검시사건부상의 검찰 기록을 그대로 수용해 신원을 알 수 없는 ‘행려 사망자’로 단정지었다.

당시 경남매일 사회부장이자 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던 남부희 창원대학교 겸임교수는 “우리가 이 자료를 어디서 보겠느냐, 경찰의 문건을 확인한 것이다”며 “그런데 위원회에서는 해당 장소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격렬한 시위가 없었다고 보면서, 타살 문제를 놓고 증거 타령만 했다. 당시 정황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사회부 기자였던 성재효 주남요양센터 이사장은 “당시 취재했을 때 해당 장소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며 “또한 경찰은 당시 유치준씨의 행적을 파악하는 등 신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행려사망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사건을 은폐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허진수 위원회 위원은 “유씨가 사망한 장소에서 시위진압대로 있었던 경찰의 증언을 최근 확보했다. 당시 가장 격렬한 시위장소였다”고 말했다.

글·사진=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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