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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 성범죄- 조고운(사회부 기자)

기사입력 : 2018-11-09 07:00:00


중학교 2학년 시절 좋아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싫어하던 수학 수업을 손꼽아 기다리고, 선물을 교무실 책상에 올려놓거나 수학 시험지 귀퉁이에 사랑 시구를 적어 제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모른 척하거나 웃어 주거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면박을 줬다. 사춘기 소녀는 그 마음이 사랑인 줄 알았지만 아마도 동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학년이 바뀌면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 기억을 소중한 추억으로 떠올린다.

▼여기 또 다른 중2 소녀도 선생님을 좋아했다. 고민을 들어주는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학원 선생님이 좋았다. 친구들에게 털어놓은 마음은 선생님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앞의 선생님과 달랐다. 소녀를 따로 불러내서 ‘나랑 사귀자, 사랑한다, 이혼하면 결혼하자’며 유혹했다. 소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한 달 만에 성관계까지 가졌다. 고통으로 관계를 거부하는 소녀에게 선생님은 ‘남자친구(나)를 위해 참아달라’고 요구했다. 선생님은 34세의 유부남이었고, 두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과 친분을 쌓아 심리를 길들인 뒤 성적인 착취를 하는 범죄를 '그루밍(grooming) 성범죄’라고 한다. 형법상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은 만 13세 이하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나쁜 어른들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 성범죄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간다. 재판에 넘겨진 이 학원 선생님인 A씨도  피해 아동과 연인관계로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A씨에게 ‘아동복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실형을 면한 것이다.

▼좋아하는 어른이 ‘사랑’을 무기로 과한 요구를 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13세 아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소녀에게 사랑과 폭력을 구분짓는 책임을 지우는 게 가능한 일인 걸까. 우리는 모두 소녀와 소년이었다. 그 시기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지 잘 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소녀에게 미안하다. 25년 전 짝사랑했던 선생님이 좋은 어른이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조고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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