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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존재와 떠남에 대하여- 이윤(시인)

기사입력 : 2018-11-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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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시내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할머니께서 지팡이에 몸을 반 이상 기댄 채 힘겹게 버스에 올랐다. “기사양반, 이 버스가 구포역 가는 거 맞지요?” “네, 할머니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몇 정거장을 달렸을까. 할머니는 건너편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다른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적막을 깨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이봐요. 00네 할머니 아녀? 아이고, 맞네! 나 모르겄어? 대구 살다 이사 간 00네야.”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다른 할머니는 몇 마디 설명이 곁들여지자 이윽고 생각이 난 듯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시작된 두 할머니의 대화는 버스가 구포역에 도착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3년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저절로 났다.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을 해내느라 친정은 늘 뒷전이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마치 엄마가 이야기하듯 두 할머니의 애틋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슬며시 눈시울이 젖어왔다. 엄마가 더 사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이렇게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걸까. 한참을 듣고 있다가 두 할머니가 반가워하는 모습에 슬며시 자리를 바꿔 두 분이 함께 앉으시도록 했다. 할머니는 차가 구포역에 도착하자 만면의 웃음을 금세 거두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네”라며 눈물을 훔치신다. 차에서 내린 후에도 차안을 들여다보며 계속 손을 저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산다는 건 이렇게 서로에게 기억되고 그리움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살아 한 번만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그리우면 만나자. 망설이지 말자. 불가에서는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라 하지 않았던가! 산 것은 멸하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진다고 했다.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이른다. 인생이란 만남과 이별의 변주곡인지도 모른다.

사십 중반에 친했던 문우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하루 전에 아이들이 수능시험을 치렀고 우리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느라 저녁에 만났다. 행사장 근처 공원에서 밤하늘 달빛을 바라보며 친구가 서글픈 말을 던졌다. 무엇을 위해 아득바득 살았는지 모르겠다. 사는 게 허망하다고 했다. 11월 밤 날씨라 몹시 추웠고 옴 몸이 떨려 일찍 헤어졌다. 다음 날 그녀는 일터에서 쓰러졌고,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엄마를 붙들고 오열하는 아이들 옆에서 다만 생자필멸이라는 말을 입속으로 되뇔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가슴이 아팠고 꿈에 시달렸다. “어버이에게 해드릴 것이 없으면 하루 세 번 웃음이라도 지어드리라”는 말이 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돌아서면 좀 더 잘해 드려야지 하면서 순간순간 부딪히는 일상에선 고분고분해지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일어날수록 죄책감이 커진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지만 하루쯤은 시간을 내어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보아야 할 곳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나와 연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는 마음 또한 중요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 일상생활은 아주 사소한 일이 이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 마음의 자세에 따라 우리는 행복을 열 수도 불행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을 소중히 하는 그 마음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 내 앞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 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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