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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빨간머리 앤- 문복주(시인)

기사입력 : 2018-11-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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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빨간머리 앤이 초록 들판을 달리고 있는 그림을 2m 천에 인쇄해 현관 왼쪽 벽에 걸었다. 마침내 우리의 새 집은 ‘빨간머리 앤의 집’이 되었다.

지리산 자락 산골에 귀촌해 16년을 살았다. 어느 날 아내가 느닷없이 정색하며 집을 팔자고 했다. 거, 무슨 천둥 치는 얘기요. 요약하면 이렇다. 여자가 운전하여 산속을 오가는 것이 무섭다. 먼 훗날 행여 한쪽이 없다면 여자나 남자 홀로 산속에 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람 구하기 별따기인데 1600평 땅을 어찌 관리하겠는가. 나이 들면 시장 가깝고 병원 가까운 도시에 살라는 명언이 있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내키지 않지만 땅이 팔리면 따르겠소. 큰 땅덩어리가 어찌 쉽게 팔리겠는가 했는데 너무 쉽게 팔려 버렸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은 고뇌에서 사색으로, 사색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인생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뒤늦은 인생이 다시 시작되었다. 뒤를 돌이켜보았다. 앞을 내다보았다. 인생 자체가 미로찾기여서 기쁘기도, 슬프기도 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지의 미래가 두렵기도 했지만 설레기도 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집을 지어주겠오. 정말요? 그럼, 빨간머리 앤의 집을 지어주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남해 독일마을처럼 하얀 집에 빨간 지붕이 있는 이층집을 지어주세요, 창가에 서면 멀리 길이 보이고 마을이 보이는 이층집에 살고 싶어요. 그러니 빨간머리 앤의 집을 지어주세요.

왜 아내는 이층집을 지어달라고 하는 걸까? 왜 아내는 빨간머리 앤처럼 마을이 보이는 집을 지어달라고 하는 걸까? 나는 점점 빨간머리 앤이 궁금해졌다.

빨간머리 앤의 책을 읽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서울 교보문고에 가니 빨간머리 앤에 관련된 상품들이 한 코너를 차지하여 엄청 많이 팔리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인터넷에 빨간머리 앤을 치니 깨소금 보조개를 가진 소녀 앤이 깔깔거리며 아저씨, 저랑 친구 되어 들판을 달려볼래요? 그녀의 티없이 맑은 세상이 한없이 펼쳐졌다.

나는 조금씩 아내의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소녀라면 꿈꾸어 보았을 자기만의 공간, 그 방이 비록 손바닥만 한 지붕 밑 다락방이라 할지라도 혼자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꿈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어 한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다보고 혼자 세상을 달려보고픈 무한 상상, 캄캄한 밤 저 하늘 어딘가에 어린 왕자의 별이 있어 꿈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고프던 아내는 그 소녀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앤의 방을 가져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소녀시절을 그리워함에 틀림없었다. 초록의 들판을 자전거 타고 오는 우체부를 보고 달려나가는 소녀의 시절로 돌아가고픈 아내.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앤의 집을 지어주었다.

가스를 설치하러 왔던 사내가 말한다. 뭐라고요? 땅도 집도 다 아내의 이름으로 등기해 주었다고요? 아저씨, 그거 정말 간곡히 말하건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저씨, 황혼이혼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내가 말했다. 젊은이, 자네 ‘빨간머리 앤’이라는 책 읽어 보았나? 그 책 정말 재밌네. 시간 나면 한번 읽어보게. 청춘만세가 있어. 나는 앤이 되어 기쁨에 차 깔깔깔 웃는 아내 얼굴을 떠올렸다.

문 복 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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