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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610년 창원시, 미래를 묻는다 (1) 과거에서 현재로

610년 역사도시, 산업화 거치며 ‘기계메카’ 도약

기사입력 : 2018-11-26 22:00:00


6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창원시가 ‘통합시’를 뛰어넘어 ‘특례시’라는 몸에 맞는 옷을 갖춰 입을 준비에 나서는 등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난 2010년 창원·마산·진해 3개 시 통합으로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로 규모를 키운 데 이어 ‘특례시’로서 도시 규모에 걸맞은 법적지위와 자치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외형적 성장에도 통합 3개 시지역의 불균형, ‘계획도시 창원’의 도시근간 붕괴, 창원국가산단의 경쟁력 약화 등 성장통은 아직 여전하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미래를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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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산업단지 전경. /경남신문DB/

10년 전, 2008년 창원시 의창구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창원탄생 600년’ 행사였다. 계획도시로만 알고 있지만 창원은 6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도시다. 여기에 산업화 과정에서 창원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농산어촌이 공업도시로 비약적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610년 창원 역사= 창원 시민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창원시를 대한민국 최초 계획도시로, 옛 마산·진해와 통합되면서 성장한 짧은 근대 역사의 도시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창원·마산·진해는 역사적으로 한 뿌리였다.

창원이란 지명이 탄생한 것은 6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에는 의창현(옛 창원 일원)과 회원현(옛 마산 일원)이라 불렸다.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태종 8년(1408년 7월 13일, 음력)에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하여 창원부로 승격되면서 창원이란 지명이 처음 탄생했다. 옛 진해였던 웅신현은 당시 창원부의 영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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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부 권역부.

이후 창원부는 태종 15년인 1415년에 도호부로 바뀌었고, 선조 34년(1601년)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됐다. 대도호부는 도호부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창원지역이 국가에 공이 많다고 인정되었을 때였다. 도호부는 지금으로 치면 시(市)에 견줄 수 있다.

이후 마산지역은 마산항 개항에 이어 일본강점기의 1910년 마산부 출범으로 창원군에서 독립한 뒤 1949년 마산시로 승격하게 되면서 분리됐고, 진해지역은 1912년 진해면이 된 뒤 해방 이후 1955년 진해시로 승격·분리됐다. 즉 현재 3개 시가 통합된 창원의 명칭은 610년의 (1408년 창원부) 역사를 가진다.

◆어떻게 ‘기계산업 메카’ 됐나= 창원시는 계획도시로 개발되면서 동시에 ‘기계 산업의 메카’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현재까지 창원에 계획도시의 근간이 남아 도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상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 주도의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계획도시가 건설된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주로 섬유, 가발 등 경공업제품의 수출을 위주로 국제경쟁력을 키워왔으나, 1970년대 들어 다른 개발 도상국들의 해외 시장 진출 확대로 경쟁이 격화되면서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로 개편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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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 모습.

당시 우리나라 경제의 장기정책목표는 ‘1981년에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었는데,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전략적 거점을 확보해 기계공업을 집중 육성하는 방안이 부각된 것이다.

창원지역은 입지적으로 동남권 공업벨트의 중간고리 역할과 함께 사방이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로서 보안상 천혜의 요새이며, 광활한 공장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적지로 선정됐다.

◆박정희·캔버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창원의 공단 예정지를 살펴본 뒤 1973년 9월 19일 지시각서를 내린다.

내용은 ‘국제수준의 기계공업기지화를 위하여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과 지원시책에 관한 다음 사항을 지시하니 관계 기관은 차질없이 시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는 것이다.

이후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 개발 사업이 결정되고, 산업기지개발촉진지역으로 확정·고시됐다.

당시 창원공업기지의 규모는 1400만평의 주거지역과 300만평의 공장용지로 구성됐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의 논, 밭, 대지, 임야 등을 모두 공장용지로 조성한 후 새로운 터전 위에 공업용지, 주거용지 및 공공용지로 구분해 시설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국가 주도의 토지 매수와 이주 절차가 진행되긴 했지만, 농업을 위주로 생활 터전을 꾸려오던 원주민들의 희생이 수반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창원공업기지는 제1단지 등 10개 단지로 이루어졌으며, 단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폭 50m, 전장 12.8km의 직선도로인 창원대로 (기지대로)를 축으로 남쪽은 공업지역으로 생산기능을, 북쪽은 주거 및 상업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이는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로 한 것이다.

◆창원출장소= 창원공업기지에 입주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1976년 9월 1일 창원지구출장소가 세워졌고, 3년 7개월 만인 1980년 4월 1일 창원시가 개청했다.

1983년 경남도청이 이전해오고 1995년 ‘도농통합’ 등을 거쳐 시는 산업화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창원공단 입주업체는 1980년 120개 업체, 수출액 2억3500만달러에서 1990년 315개 업체 수출액 14억4600만달러, 2000년에는 1026개 업체 수출액 65억6300만달러를 기록했으며, 시 인구는 1980년 11만명에서 1990년 32만3000명으로, 2000년 51만9000명을 기록하면서 인구 50만의 도시로 성장하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곁에서 오늘의 창원국가산업단지와 창원시를 설계한 오원철(90)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2010년 본지와 인터뷰에서 “사람(인재)에 바다를 낀 입지, 기온 변화가 클 경우 발생할지 모르는 철강재의 늘고 줄어듦을 막을 수 있는 따뜻한 기후, 진해 해군정비창과 부산 조선소 등 인근에 연관산업이 있어 방위산업 적지였다”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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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공단의 상징 공업탑과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씨./경남신문DB/

그는 또 “일본에서 제일 큰 기계공장은 히다치로 발전소, 군함용 엔진, 기차, 병기 등 소위 종합기계 메이커인데 창원공업기지를 완성, 탱크, 장갑차, 군함과 항공기용 엔진, 특수강부터 민수용인 각종 기계·장치, 선박·자동차 부품, 객차, 기관차 등이 다 가능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오 전 수석은 특히 “국태민안과 유비무환을 위해 국가 방위산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시가 창원이며 이제 원자력기기(두산중공업)와 탱크(현대로템), 군함엔진(두산엔진), 발칸포(S&T중공업) 등을 생산하는, 세계에서도 몇 개 안되는 1000만평 이상의 계획도시이자 방위산업도시로 창원이 더욱 번창해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 키고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국태민안, 유비무환의 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나타냈다.

◆통합창원시 출범= 창원시는 2010년 7월 창원·마산·진해 3개 시의 통합으로 인구 108만의 메가시티인 통합 창원시로 거듭났다. 지난 정부들을 거치며 국가적 차원에서 지방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이어져 왔고, 이명박 정부 때 지역 간 통합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지역 국회의원과 시의원 등 정치권의 주도로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 지역의 찬-반을 둘러싼 지난한 갈등과 반목을 거쳐 전개된 결과였다.

주민 50% 이상 찬성의 여론조사와 지방의회의 의결이란 과정을 거쳐 3개 시가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통합 의지를 정부에 전달해 ‘전국 최초 자율통합’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통합 당시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 없이 통합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통합이 졸속적으로 이뤄졌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 지역주의가 더해지면서 물리적 통합은 했지만 화학적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겼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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