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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세계여행] 싱가포르(2)

배 모양의 수영장이 인상적인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유명

숙소서 바라본 야경 아름다워… 다양한 술·음식도 즐길 수 있어

기사입력 : 2019-01-10 07:00:00


내가 여자들과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약간 의심하는 눈초리로 ‘너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급히 ‘우리 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어머니한테 한국말을 조금 배웠는데, 여자들과 몇 마디 나눠봤어’라고 어물쩡 넘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남자의 장단에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들과 같이 호흡 맞춰 즉흥적으로 연기하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어 남자의 귀에다가 대고 귓속말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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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화려한 밤풍경.

‘이 여성 분들 내일 새벽에 체크아웃이라는데? 아까 이야기해보니까 여행사에서 공항까지 아침에 가야 해서 이분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짐 싸서 나간다더라. 다 같이 네 친구 집에 가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의 탐욕을 끊어버릴 수 없을 바에는 탐욕을 느슨하게 할 수 있을 법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로 어루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무슨 그런 일정이 다 있냐며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여자들은 기본적인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어로 하는 대화는 더욱 짧아지기 시작했고 졸지에 내가 한국말로 중간에서 통역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사실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묵은 여성 분들의 체크아웃 시간은 정말 새벽이었다. 여담이지만 여행사를 통해서 여행을 갈 때 이런 이상한 일정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돈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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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화려한 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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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화려한 밤풍경.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리를 파하기 위한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탐욕에 이성을 지배당한 남자들은 집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물었다.

“브로(bro), 너 그럼 내일 뭐해? 이 시간에.”

남자는 말했다.

“오늘 아무것도 없으면 내일 여기 또 올 거야.”

역시나 술이든 뭐든 취한 남자의 탐욕은 이성보다 튼튼하다.

“그럼 우리 내일 여기서 또 보자. 나 런던 갈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 그때 내일 여기 또 올 테니까 전화번호 교환하고 내일 연락해서 여기서 다른 여자들을 노리자. 오늘은 나도 여행하느라 너무 피곤하고 어차피 이 여자 분들이랑 끝까지 노는 건 무리로 보이는데? 내일을 기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이메일을 주고, 전화번호를 주고 난 뒤,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이메일을 교환한 뒤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와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기는 했지만,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길의 걸음까지 조심해야 했다. 조급한 모습을 보이거나 달아나는 듯한 뒷모습을 보인다면, 거기에서 어떤 공포감이 느껴진다면, 남자에게 덜미를 붙잡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짧지만 긴 길을 걷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 나는 여성들에게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신들 술에 약을 탈 거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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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화려한 밤풍경.

그때서야 여자들은 모든 상황을 수긍했고, 놀란 얼굴에 공포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제 정말 오늘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잘 생각해보면 그 상황을 나는 혼자서 모면하고 내 방에 가서 마리나베이샌즈 숙박의 묘미라 할 수 있는 야경이나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여행 중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런 황당하고도 일면 공포스러운 일은 나도 난생처음이었다. 상황의 맥락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리도 없었겠지만 그저 ‘나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개인주의자이자, 자유로이 살아가는 진보주의자이지만 외국에서 나는 유독 ‘오지라퍼’였거나,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지키려 하는 보수주의자이자 애국심 넘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에 하나 또 다른 방법으로 내가 여성들을 호위하며 남자의 악한 행위 시도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명심하자, 타지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기 마련이다. 밤에는 더 그렇다. 아마도 내가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깨달은 것들 중 한 가지가 이 점이다. ‘여행은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

실제로 1년에 호주에서 실종되는 여행객이 수백명이나 된다는 통계는 유명하다. 여행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또한 여행은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 여행이 지금껏 안전했던 이유는, 그 많은 나라를 다니고도 멀쩡히 좋은 기억들을 가진 이유는 아마도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해가면서’ 여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빌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와 기지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온 수많은 여행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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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화려한 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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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안에 진열돼 있던 다양한 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우리를 향해 쿵쾅거리며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치 공포영화 속 살인마가 문을 향해 질주하는 듯한 격한 발걸음. 그 소리보다도 더 빠르게 공포감은 심장 가득히 팽창했고 그 순간 막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을 부여잡은 남자의 거친 손을 보자 비명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임이 분명했고, 역시나 그였다.

태연한 척 내가 말했다. “자리에 뭐 두고 왔어? 무슨 일이야?”

그 남자가 어떤 공포영화에 나오는 얼굴보다도 더 괴기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넌 몇 층에 묵어?”

엘리베이터 버튼은 여자들이 누른 4층과 내가 누른 23층이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응, 나 4층. 왜?”

“너 내일 꼭 여기 또 와야 해! 내일 같이 또 놀자! 여자 분들은 굿나잇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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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그렇게 그 남자와의 에피소드는 마지막까지 공포스러웠지만 이후 여자들과 나는 따로 술을 한잔 더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쩌면 당시 여자들한테는 내가 제일 위험한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하하)

다음 날 그녀들은 비행기를 무사히 탔고, 이후로도 한국에서도 즐겁고 좋은 날들을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나는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약속한 대로 클럽에 다시 갔다. 다행히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고, 나는 그날에서야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맥주를 마시며 싱가포르의 아름다운 야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싱가포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여행자들 모두 안전하게 여행하고, 여행 가면 자나 깨나 나와 남을 두루두루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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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리버맨)

△1983년 마산 출생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창원대 사회복지대학원 재학중

△카페 '버스텀 이노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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