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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501) 제24화 마법의 돌 ①

‘정치가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기사입력 : 2019-01-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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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은 때때로 눈을 들고 남산을 응시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 겨우 70세를 조금 넘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못하다니!’

이정식은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내가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다니. 한국에서 돈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데 쓰지도 못하고 죽는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을 잘 때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최근에는 같이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전에는 그러한 말을 들어도 무심했으나 이제는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저렸다.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자주 보았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오지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젊은이들이 첩첩 산속이나 낯선 바닷가를 걷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끝이 난다. 그런데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는구나. 아름다운 사랑 한 번 못해 보고 죽는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었으나 중매에 의한 결혼이었다. 그의 아내는 당시 여당 당 대표를 지낸 인물의 딸이었다. 중매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슴 시린 사랑은 해보지 못했다. 이정식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자동차 공장이 하나야.’

대우그룹의 자동차는 GM에 넘어 가고 쌍룡그룹 자동차도 외국에 넘어갔다. 삼일그룹 자동차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가 강제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구조조정이었다.

‘정치가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정치가들은 관리들을 조종하여 기업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기에는 학자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학자들은 구조조정을 주장하고,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기업에 유리한 구조조정을 시킨다. 정계, 재계, 관계, 학계까지 한통속이 되어 기업을 농락했다. 모두 썩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를 빼앗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이정식은 휴대폰과 반도체 사업을 생각하자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반도체의 시작은 휴대폰보다 더 오래전의 일이다. 그는 부친인 삼일그룹 창업자 이재영 회장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과학 다큐멘터리 책을 읽게 되었다.

‘반도체가 모든 전자제품에 쓰일 것이라고?’

이정식은 책을 읽기 시작하자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도체는 전기전도도에 따라 도체, 반도체, 부도체로 분류한다. 첨단전자산업에 널리 응용되고 있어서 ‘마법의 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중심이 되겠구나.’

한국은 겨우 텔레비전을 생산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방송은 흑백 화면이었고 유신 통치가 한창이었다.

1974년이었다. 연초부터 긴급조치가 휘몰아쳐 정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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