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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충무로 한복남- 김현숙(수필가)

기사입력 : 2019-02-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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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별명이 하나 생겼다. ‘충무로 한복남’ 사진을 보면서 나름 짐작도 했지만, 내 눈앞에 선 아들의 모습은 놀랍고도 낯설었다.

귀 뒤로 넘겨 꽂은 머리카락이 목덜미 안쪽으로 수북하게 내려와 있었고 턱밑으로는 마구 자란 수염이 목젖을 덮고 있었다. 그나마 콧수염은 손을 좀 본 티가 났다. 지난 여름방학 때 다녀간 뒤로 처음이다. 늘 하듯이 아들에게 덥석 안겨 안부를 물었다. 대답보다 녀석 수염이 얼굴에 먼저 와 닿았다. “뜨시겠다, 야.” 어색했던 모양이다. 한다고 한 말이 그랬으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것도 뜨시나?”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옷자락을 손바닥으로 비벼봤다. 도대체 어디서, 얼마를 주고 사는지, 이런 걸 왜 입는지 묻고 싶었지만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나 이제 어른이요’ 하면서 내 간섭을 막는 것 같아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훈기라고는 1도 없는 뻣뻣한 촉감에 펄렁한 가랑이로 쉴 새 없이 바람이 드나드는 그런 옷을 걸치고 도대체 뭐하는 거냐며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 자취방으로 가는 내내 아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가 뭘까,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옷을 입고 저러고 사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간이 옷장에 걸린 개량한복들이 눈에 띄었다. 두께 차이와 소매 길이 차이만 있지, 다 똑같은 옷들이었다. 옅은 쑥색에 회백색이 둘, 여름용으로 3벌이 있었고, 세로로 골이 파인 쥐색 2벌과 아들이 입고 있는 것은 보아하니 이 계절용인 듯했다.

“그럼 봄가을엔 뭐 입는데?” 아들이 “저거 위에 이거 걸친다” 했다. 저거라니, 아들이 턱으로 가리킨 저거는 여름용 개량한복이었다. 걸친다고 내놓은 것은 여밈 장치가 없는 카디건 형태의 겉옷이었다. 이 녀석이, 정신이 있나 없나, 이건 제대로 해보겠다는 심사가 아닌가. 그저 장난삼아 그러고 말겠지 했는데. 아무리 제 멋에 산다지만 적어도 제 또래처럼은 입고 신고 해야지 말이다. 얼굴을 돌려 한숨을 뱉었다. 한 번 더 한숨을 뱉었다. 김현숙, 진정해라. 지금 필요한 건 뭐다? 일단 상쾌하게 넘어가자. 알았지. 저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칙칙하기 없기다.

“멋지다, 김.종.수.” 아들 이마를 쓸어주고 방을 나왔다. 울 일도 아니고 웃을 일도 아닌 일 앞에 섰다. 녀석도 계기가 있었겠지, 저런 옷을 입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아이였으니, 아마 큰 이유가 있었을 거다. ‘억수로 편하다’는 말이 툭 튀어나올 만큼 저 옷을 알아버리기까지 아들은 많은 일을 혼자 결정하고 책임져 왔을 것이다.

짐작하자면 짐작 못할 일도 아니다. 빤한 살림에 서울 공부 시켜달라고 했을 때 제 스스로 다짐했던 말이 있었다. 학비만 해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한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생뚱맞은 저 고집이 이해가 된다.

스물, 제 앞에 놓인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아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 뭐를 그만둬야 할지 가늠도 못할 때, 아들은 어떤 결심을 했을까. 오늘 본 녀석의 모습이 그 결심의 시작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들은 지금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어떤 지점을 인생에 만들고 있다. 나조차 그리 여겨주지 않으면 내 자식이 너무 춥지 싶다. 아들이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어이 충무로 한복남, 삼겹살 무까?”

대번에 ‘엉’이다. 좋다는 말이다. ‘응’보다 한 톤 올라가는 목소리가 났고 콧소리까지 섞였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좋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들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뭐 다를 것도 없는 다른 옷으로 바꿔 입었다. 외출복에 고기냄새 배면 안 된다나 뭐라나.

김현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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