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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남쪽 땅끝, 소복이 내려앉은 평화

남도 여행

기사입력 : 2019-02-13 22:00:00

학생 시절 그리고 백수 시절 나의 여행은 언제나 치밀했고 촘촘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가며 계획을 세웠고, 흐트러짐이 없도록 확인 또 재확인했으며, 혹시라도 일어날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셔틀을 놓쳤다거나 뭐 그런…)에 대비한 플랜 B까지 철저하게 마련했다. 구글 지도를 띄워놓고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그 동선에 따른 맛집과 카페를 모두 검색했으며, 그 집에 다녀온 블로거들의 실제 후기와 음식의 비주얼을 검색해 꼭 들러야 할 곳과 여차하면 패스해도 무방할 곳을 선별했다. 그래야만 안심이 됐고, 뭔가 ‘제대로’ 여행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직장인이 된 지금,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도 체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의 여행 패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반드시 보고 와야 할 곳들과 주변 지도는 미리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지만, 몇 시 몇 분에 특정 랜드마크에 방문해야 하며 몇 시 몇 분에 그곳을 떠나 몇 시 몇 분까지 다음 장소에 도착해야 하는지, 주변 소문난 맛집은 어떤 건물을 끼고돌아 몇 미터나 도보로 이동해야 보이는지…. 이제 그 정도까지는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여행의 효율성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조금 더 독창적인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을 방문하는 누구나 겪는 일들보다 나만의 에피소드들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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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해남 미황사.

△ 06:00 AM= 억울하다. 주말인데 너무 이른 시간에 눈을 떠버렸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약속도 볼일도 없는데 말이다. 다시 잠을 청해볼까 싶었지만 겨울 아침이라 그런지 차가운 방 안의 찬 공기를 한번 느끼고 나니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나저나 집이 왜 이렇게 추운 걸까. 보일러를 확인해보니 불길하게도 빨간 램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 보일러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이 정도 추위라면 보일러 수리공 출장 요청이 한두 건이 아닐 터. 게다가 오늘은 주말. 오늘 안에 보일러가 수리된다는 보장도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그냥 집을 나가버리기로 했다.

△ 07:00 AM= 내 책꽂이에는 어느 관광안내소에서 집어 온 ‘한국 관광 100선’ 지도가 있다. 지도에 표시된 100군데는 무조건 다 가보겠다는 목표를 하나씩 달성 중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거의 20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산과 서울, 경기도 명소들은 대부분 가봤지만 그 외의 지역, 특히 전라남도는 방문한 경험이 거의 없다. 지도에는 남해안을 따라 여수 오동도, 보성 녹차밭, 정남진장흥토요시장, 강진 가우도가 표시돼 있었다. 남도 음식이 맛깔나기로 유명한 건 알지만 정남진장흥토요시장의 유명 먹거리가 무엇인지, 잠은 어디에서 자는 게 좋을지 아무런 정보도 준비도 없이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차 키를 챙겨 남해고속도로에 올랐다.

△ 10:00 AM= 겨울 한파 때문인지 주말임에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경상남도를 지나 전라남도에 접어들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정남진장흥토요시장에 들러 수더분한 시장표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음 목적지를 고민해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장흥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따뜻해서 겨울에도 방목 사육이 가능할 정도라 명품 한우가 생산되는 곳이라고. 그래서 유명한 것이 바로 ‘장흥 삼합’이다. 한우-표고버섯-키조개의 삼합이다. 조개가 품고 있는 바다의 향과 소고기의 고소함 그리고 표고버섯의 담백함이 의외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한다. 물론 맛보진 않았다. 첫 끼로 고기를 먹는 것도 그것도 혼자서 고기를 굽기도 부담스러워서…. 그래도 한우는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주변을 둘러보니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는 소머리국밥집이 있었다. 비주얼도 맛도 소박하고 정직한 한 쟁반이 나왔다. 잘 익은 배추김치와 상큼한 깍두기, 아삭한 콩나물무침과 오이무침, 코끝이 찡한 청양고추 그리고 뜨끈한 소머리국밥과 하얀 쌀밥. 우수한 품질의 한우에 40년 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더해 푹 끓여낸 한 그릇이니 맛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 2:00 PM= 국도를 타고 더 서쪽으로 조금 더 남쪽으로 달렸다. 땅 끝에 닿기 위해서다. 길가에는 소복소복 하얀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 길목에 대흥사에 잠시 들렀다. 대흥사는 두륜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이곳을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했다고 한다. 서산대사의 선견지명이 정확했던가 보다. 대흥사는 신라시대 때 터를 잡은 이후 천 년 동안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역사와 또 그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고찰인 대흥사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비롯해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서산대사탑(보물 제1347호), 대흥사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 다양한 성보문화재가 대흥사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한다. 이를 알아본 유네스코도 지난해 6월 대흥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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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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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대흥사의 또 하나의 보물은 차(茶)다. 조선 후기 대흥사에서 수행했던 초의선사는 대흥사에 전해지던 제다법을 복원해 초의차(초의가 만든 차)를 완성하고 대흥사를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성지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뜨거운 물로 차를 우려도 쓴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초의차의 특징이다. 귀로는 얼음 사이를 흐르는 대둔사 계곡물의 맑은 소리를, 눈으로는 하얀 눈이 쌓인 평화로운 고찰의 전경을, 코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초의차의 향기를 즐기면서 대흥사 구경에 언 몸을 녹였다.

△ 5:00 PM= 한반도의 시작이자 끝인 해남 땅끝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유일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4인실 도미토리에 오늘 밤 게스트는 나 혼자였다. 덕분에 너무나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서는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혼자 온 투숙객들을 배려해 1인분도 주문이 가능한 메뉴들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었다. 해남의 특산물인 매생이국을 먹었다. 여담이지만, 매생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음식임에 틀림없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긴장을 늦추어선 안 된다.

△ 다시, 아침= 겨울의 밤은 빨리, 겨울의 아침은 더디게 시작된다. 덕분에 여유 있게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세찬 바닷바람에 굴복하지 않도록 패딩과 목도리, 장갑에 모자까지 완전 무장. 땅끝 해안로 둘레길을 걸으며 오늘의 해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일출 그 자체도 멋졌지만 황금빛 햇살이 둘레길 구석구석을 비추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나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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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일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토스트와 계란프라이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창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난로 곁에 커피 한 잔을 두고 벽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을 읽으며 좀 더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이대로 늑장을 부리다간 고립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렀다. 여전히 오늘도 계획은 없다. 장흥과 해남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보성 녹차밭으로 갈까 아니면 여수 엑스포 공원으로? 아니면 둘 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쨌든 북동쪽이다.

△ 우연한 발견, 미황사= 내비게이션에 최종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고 북동쪽만 향해 운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로 표지판을 더 자세히 보게 됐다. 익숙한 초록색의 표지판만 보다 보니 갈색의 관광지 안내 표지판이 유독 눈에 띄었다. 미황사는 좌회전. 시간 맞춰 가야 할 목적지도 없으니 잠시 들러보자는 생각으로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했다. 달마산 중턱에 앉은 이 사찰은 대흥사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해 우리나라 육지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절이다.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뿐 그 흔한 산채비빔밥 식당 하나 없었다.
메인이미지눈 쌓인 해남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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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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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의 보살상.

오솔길을 따라 오르려던 찰나, 그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는 아저씨 두 분을 만났다.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우니 차는 여기에 주차하고 힘들더라도 걸어 올라가라 하셨다. 그 아저씨들은 귀인이셨음에 틀림없다. 한 고개 넘고 나니 거의 10m마다 사고 차량이 한 대씩 보였다. 나무에 꽝, 전봇대에 꽝 차들끼리 꽝. 그 두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도 겪었을 상황이라 생각하니 식은땀이 주욱 흘렀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절이지만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종일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 춥기는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화로워졌다. 직전에 오솔길을 오르며 마주했던 기분과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 돌담 위에 얹어져 있는 작은 보살상 위에도 눈이 쌓여 추운 날씨에 보살님이 마치 럭셔리한 밍크 목도리를 두르신 것 같이 느껴져 혼자 싱긋 웃었다.

마음 가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겼던 이번 남도여행.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경험하고 또 그때마다 달라지는 기분들을 경험하면서 이 우연의 연속들이 얼마나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과도 얼마나 닮아 있는지도. 청춘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메인이미지 △ 손수나
△1988년 부산 출생
△조지워싱턴대학교 정치학 전공
△경남메세나협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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