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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사적지는

경남 전역에 만세시위 불길 … 뜨겁게 오래도록 타올랐다

기사입력 : 2019-03-03 22:00:00

100년 전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 맞서 전국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남 지역의 3·1운동은 충북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점화됐지만 어느 곳 못지않게 치열하게 전개됐다.

경남 3·1운동은 그 기간만으로도 전국에서 가장 길고 늦게까지 전개됐다. 경남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까지 총 179회의 시위가 거의 매일 전개됐다. 시위 참가 인원은 연인원 약 10만명에 달했다.(김상환, ‘경상남도의 3·1독립만세운동’, 경인문화사 68~69p, 2012. 김상환은 3·1 동지회, ‘부산경남 삼일운동사’와 이대수 편저 ‘경남항일운동참여록’ 등을 근거로 경남의 시위를 정리했다. 다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발간한 ‘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보고서’는 경남의 총시위는 173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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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역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경남에서 전개된 3·1운동과 관련한 일제 관헌기록(조선헌병대사령부, ‘1919년 조선소요사건현황-대정8년 6월 헌병대장 경무부장 회의 석상 보고’)에 따르면 “3월 11일 발발, 4월 29일에 이른 50일간에 걸쳐 일어났다. 그간 무사 평온한 날은 14일이고, 36일에 걸쳐 소요가 일어났다. 가장 빈발한 날은 4월 3일 16회로 가장 많고, 하루 평균 발생 횟수는 3.6회다. 소요 인원이 가장 많은 곳은 합천군 삼가면 금리의 1만명이다. 다음으로 진주와 하동읍내에서 6000명이 참여했고, 가장 적게는 김해 읍내에서 7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소요를 일으켜 검거된 사람은 남자 2377명, 여자 72명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경남에선 먼저 3월 11일 부산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가 일어났다.(경남 최초 시위장소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3월 9일 함안 연개장터가 경남 첫 시위장소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어 3월 13일 동래 창녕 밀양 사천 양산 하동, 3월 14일 의령, 3월 18일에는 합천 진주 통영으로 확산됐다. 창원 함안 김해는 3월 하순에 전개됐고 울산과 남해 진해는 4월 상순에 가서야 시위가 개시됐다. 이처럼 경남의 3·1운동은 끈질기고 줄기차게 전개됐다. 시위는 3월 18일과 19일, 4월 2~4일 절정에 달했다. 4월 중순 이후로는 일제의 병력 증강 배치로 탄압의 강도가 더해지면서 가라앉기 시작했고 4월 말에는 찾기가 어렵게 됐다.

경남지역 3·1운동은 도내 21개 지역(2부·19개 군) 중 한 곳도 빠짐없이 일어났고, 한 지역에서 1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회 내지 수십회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치열했던 경남의 3·1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화에 큰 밑거름이 됐다.

이상규 기자

*도표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刊 ‘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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