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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얘들아 밥 먹자 청소년 밥차’ 운영 이은경 대표

쓰담쓰담 밥 한끼에 소복소복 사랑 담아요

27년 전 함안으로 시집와 경남과 인연 맺었어요

기사입력 : 2019-03-07 22:00:00


“얘들아 밥 먹고 가.” “왜 밥 줘요.” “너희들이 잘 먹고 잘 자라야 너희 나중에 낸 세금으로 내가 노후에 편하게 살지.ㅎㅎ.”

매주 금요일 오후 6시가 되면 창원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 뒤편 사거리에는 어김없이 녹색 밥차가 등장하고, 지나가는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밥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얘들아 밥 먹자, 청소년 밥차’를 운영하는 이은경(51) 대표와 자원봉사자들이다. 지난 12일 저녁 합성동에 나타난 밥차는 과일과 유부초밥이 든 도시락 150여개를 메뉴로 내놓았다.

이 대표와 자원봉사자들은 지나가는 청소년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밥 먹고 가라고 권했고, 처음에는 주춤하던 청소년들도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도시락을 받아간다. 밥차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가져온 도시락은 모두 동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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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밥 먹자 청소년 밥차’ 이은경 대표가 청소년들에게 나눠줄 도시락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전강용 기자/


◆가출해 밤늦게 배회하는 청소년 보고 밥차 시작= 지난 2014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축구를 하고 싶은 아이들로 축구팀을 만들고 이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이 개봉돼 화제를 모았다. 이 대표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찬란한 FC 사회적 협동조합’의 단장으로 있었다. 마침 사무실이 합성동에 있었는데 영화를 찍고 나서 앞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막차를 타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을 가는데 집에 가지 않고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봤다. 물어보니 대부분 가출한 아이들이었다.

인구 110만명의 창원시에 가출한 여자아이들을 위한 쉼터가 없다는 데 충격을 받고 쉼터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게 밥차였다. 마산·창원 YMCA, ‘꽃들에게 희망을’ 등 단체와 밥차위원회를 만들고 2017년 10월부터 밥차로 청소년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면서 쉼터에 대한 이슈를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 SNS를 통해 활발하게 홍보도 펴나갔다. GM대우노조에서는 선뜻 밥차를 지원해주고, 후원물품 등을 대는 분들도 늘어갔다. 쉼터를 만들기 위해 밥차를 이슈와 홍보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밥차는 이 대표가 포도 등을 경매가로 받아 직접 판매해 자금을 만들기도 하고, SNS로 쌀 등 물품을 후원받아 운영한다. 이 때문에 후원 물품에 따라 메뉴가 그때그때 달라진다. 대신 청소년들을 먹이는 것인 만큼 재료만은 가장 신선하고 좋은 것만 고른다. 요리를 하는 장소도 후원과 자원봉사자들에 따라 일반 가정의 부엌이 되기도 하고 복지관 급식소가 되기도 한다.

처음 밥차를 시작하던 날 김밥 150인분을 만들어 나갔지만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반 이상이나 남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동날 만큼 인기가 있다. 후원물품에 따라 밥차 메뉴가 정해지지만 매번 입맛에 맞게 후원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메뉴 정하기가 가장 어렵다. 때론 유튜브를 검색해 메뉴를 정하기도 한다. 이 대표는 가족들에게도 그 정도로 열심히 밥을 해주지는 못했다고 웃는다.

다행히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지금까지 버텨왔다. 자원봉사자들은 이 대표의 지인이거나 SNS를 보고 찾아온 시민들이다. 그동안 밥차 자원봉사자로 나선 이들만 50여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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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와 자원봉사자들.


◆목표였던 청소년 쉼터 조성= 아쉽게도 밥차는 오는 10월이면 운행을 중단한다. 청소년들을 위한 단기쉼터가 오는 10월에 합성동에 생기기 때문이다. 그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창원시에 전달돼 쉼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 대표는 “쉼터가 생겨 나의 목표는 끝난 것이다”라며, 더 이상 밥차 운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창원시가 쉼터를 마련해 준 만큼, 이 대표는 청소년들을 태우고 쉼터를 오갈 수 있는 승합차 마련을 마지막 목표로 삼고 후원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를 오는 3월 22일과 10월 11일 두 차례 계획하고 있다. 기업들의 후원으로 손쉽게 차량을 구입할 수도 있지만 더디더라도 시민의 손으로 차량을 구입해 마련하겠다는 마음이다.

◆서울사람, 함안으로 시집와 청소년 위해 살아= 이 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가 27년 전 남편 직장이 있는 함안으로 시집오면서 경남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취직도 어려워 결혼과 함께 함안에 가서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내려왔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급식비를 못 내는 아이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급식비를 대신 내주다가 대학 때 야학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예 집에다 공부방을 열었다. 함안 함주공원 입구에 그림책버스도서관을 기획해 아이들 전용 도서관도 만들었다. 2006년 지역아동센터 설립이 법제화되면서 사랑샘지역아동센터도 열었다.

사회복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지 못했던 그였지만 센터장이 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이 있어야 된다는 말에 온라인으로 자격증도 땄다. 그렇게 시작한 사회사업은 매년 여러 가지 일로 이어졌다. 축구를 하고 싶은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모아 축구단을 만들고, 전쟁의 폭력성과 평화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영화 ‘오장군의 발톱’ 제작자로 나서기도 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는 자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문화로 사회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을 키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제 힘만으로 안 된다면, 네트워크를 통해 음악을 꿈꾸는 아이에게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주고, 축구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축구단을, 영화를 꿈꾸는 아이들은 영화 제작을 하면서 꿈을 키울 수 있게 하려 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영화 ‘오장군의 발톱’을 제작할 때 청소년 영화캠프를 열어 영화제작 과정을 청소년들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가 제작에 방해가 된다는 스태프들의 심한 항의를 듣기도 했다.

그는 많은 사회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가 일군 사랑샘지역아동센터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5년 전 센터장에서 물러나 자칭 무임금, 무한책임, 잡부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정확히 5년간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창원시에서 만드는 청소년 단기 쉼터 운영에 욕심을 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쉼터에 필요한 차량만 만들고 나면 아예 관여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는 올해는 구직을 할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사회사업을 하기 위해 복지재단이나 관련 공식조직 속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학연, 지연도 없고 평소에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그에게 그런 자리가 쉽게 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가 부르지 않아도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팔 걷고 나서는 그라면, 철학과 비전을 가진, 모델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재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오늘도 누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수원에 있는 단기청소년쉼터를 둘러보기 위해 먼 길을 씩씩하게 달려간다.

이현근 기자 san@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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