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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32) 고성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

세상에 하나뿐인 도자 빚으며 세상과 소통하다

기사입력 : 2019-03-14 22:00:00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그릇을 빚는 기술이 뛰어났다. 그 기원은 4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방에서 집단 이동한 토착민부터 시작돼 삼국시대에는 토기가 생활화됐다. 경남 곳곳에서도 그 무렵의 토기와 파편이 발견된다. 이때부터 일반 생활용기뿐만 아니라 기와 등에 문양을 넣어 제작하며 발달했는데 고려시대엔 토기에서 자기로 진일보해 세계적으로 소문난 ‘고려청자’를 탄생시켰다.

그러고 보면 ‘빚는다’는 동사는 꽤 다양한 쓰임이 있다. 흙으로 독을 빚고, 찹쌀로 술을 빚고, 심상으로 시를 빚는다와 같이 활용할 수 있다. 빚는다는 말은 유형적으로 만드는 것 너머의 어떤 무형적인 가치를 품고 있다. 열과 성을 다해 도자를 빚으며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을 찾았다. 창작과 교육, 체험, 전시가 모두 이뤄지는 고성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고성군 구만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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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서 도예학교로 가는 동안 타임머신을 탄 듯했다. 높은 빌딩 숲에서 출발해 한 시간 남짓 달리다 보니 소담하지만 오래돼 정감 있는 건물이 반긴다. ‘금성 체인점’과 허름한 다방, 담뱃집을 지나 도예학교에 도착했다. 옛 회화중학교 구만분교였던 이곳은 지난 2005년 27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회화중학교와 통폐합됐다. 이후 비어 있던 공간에 2007년 새 가마를 묻었다.

제법 긴 이름이 궁금해 물었다. 이재림 기획자는 수로요(首露窯)는 이 공간의 모태로 관련이 깊다고 답했다. 보천 이위준 선생이 40년 전쯤 ‘금관가야’ 김해에서 도자기를 시작할 때 지은 이름으로, 옛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에서 수로를 따 전통가마를 뜻하는 요(窯)와 합쳤다. 보천 선생은 “김해 골짜기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알음알음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아져 더 넓고 찾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지금은 ‘소가야’에 자리하고 있으니 뭔가 운명 같기도 하다. 고성군 구만면은 예로부터 고령토(백토)가 많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구만면 화림리 180에 옛 가마터 흔적과 백자 도편이 대거 발견됐다. 산기슭에서 고령토를 채취해 백자 생활그릇을 제작하던 가마터로 추정되는데 다른 지역의 차사발이 대부분 크기가 작은 것과 달리 구마이(구만의 사투리) 사발은 크기가 크다. 현재 출토된 사발은 고성 소가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보천 선생이 구마이 사발을 복원하고 있다.
메인이미지 고성군 구만면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 전경. /김승권 기자/

이재림 기획자는 건물로 들어가기 전 경남에서 가장 넓은 도자기 전시장을 보여주겠노라며 웃었다. 그는 운동장 입구에서 ‘스토리텔링 도자공룡’ 해설사로 변신했다. 운동장에는 20여 점의 도자기가 전시돼 있는데 공룡들이 ‘창의력’이라는 옷을 입었다. 이 기획자는 “흙이나 도자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체험이나 전시에 임하면 좋을 것 같아 꼭 설명을 한다. 저나 아버지(보천 선생) 작품도 있고, 입주작가가 기증한 것들도 있다”고 말했다. 손으로 동물을 형상화한 ‘핸디멀’과 등에 삐죽삐죽 솟은 골침마다 자유의 여신상과 피사의 사탑 등을 심은 스테고사우루스 등 작품마다 번뜩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메인이미지 고성군 구만면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 전시장. /김승권 기자/
메인이미지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 야외에 설치된 작품들./김승권 기자/

도자 공룡을 둘러본 후 체험공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보천 선생은 천년의 찬란한 도자기 문화를 가까이에서 쉽고 재미있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 ‘체험’과 ‘교육’을 시작했다고 했다. 매년 4000~7000명의 체험객이 찾는다는 이곳은 한 번에 200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꽤 넓다. 클레이(손으로 빚어 만들기), 드로잉(백자), 물레체험 등을 할 수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룡머그’ 만들기다. 이재림씨가 대표로 있는 사회적기업 ‘땡스클레이’가 특허청으로부터 디자인등록을 받은 머그는 티라노사우루스·브라키오사우루스·하트사우루스 머그잔이 있는데 공룡의 긴 꼬리와 목을 손잡이로 활용한 점이 독특하다. 마음에 드는 머그를 선택한 뒤 안료로 색칠하고 구워내면 완성된다. 나만의 개성으로 지구 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체험공간의 한쪽엔 개성 만점 도예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11차례 열린 전국학생 창작도자기 만들기 대회 작품들이다. 실용성이나 아름다움보다 창의적이고 표현력이 뛰어난 출품작을 뽑는 것이 특징이다.
메인이미지고성군 구만면 수로요·보천도예창조학교에서 이재림 기획자가 디자인 등록원부에 등록된 브라키오사우루스 머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승권 기자/

흙으로 만든 도자는 유약을 바르고 가마로 직행해야 완성이니, 소성실과 유약실을 둘러볼 차례다. 이곳에는 가스가마 2개와 전기가마 1개, 전통 장작가마 1개가 있는데 대부분 체험객들의 작품은 가스가마에서 구워진다. 한 번에 600~700개의 컵이 들어가야 하는 데다 깨질 확률을 최대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온도를 올리는데 10시간, 내리는데 10시간이 걸린다. 말리고 식히는 과정까지 거쳐야 제모습을 찾는다. 야외로 나오자마자 길다란 전통가마와 높게 쌓인 장작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한다. 용가마, 봉가마, 너구리가마로 불리는 전통가마는 파손율이 40~50%에 달해 장인의 손길이 필수적이다. 워낙 어려운 작업이어서 레지던스 작가들이나 워크숍, 오픈 스튜디오를 열 때와 보천 선생이 작품을 만들어 낼 때만 불을 피운다고 한다.
메인이미지이재림 기획자가 전통장작가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승권 기자/

운동장에서 각 지역의 옹기와 야생화, 규화목, 녹차밭 등을 구경하며 걸으면 레지던스 작가들이 머무는 공간이 나온다. 옛 관사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해 숙박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는데 보통 5~6명의 작가들이 함께 생활한다. 사실 이곳은 ‘도자예술’을 중심으로 작가, 공간 그리고 지역과 소통하는 공유 프로젝트인 수로요 도예레지던스 운영으로 이름나 있다.

2012년부터 창작실(스튜디오)과 숙박시설을 제공하고 재료와 프로그램을 지원하며 매년 다른 주제와 기획으로 레지던스를 운영하고 있다. 6기수 33명의 입주작가가 머물렀는데 한·중도예워크숍과 오픈 스튜디오 참여 작가 등을 더하면 60명 이상의 작가가 이곳에서 창작활동을 펼쳤다. 입주작가들을 중심으로 외국 신진작가와 국내 무형문화재, 도자기 장인, 현대 도예작가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단순한 작가들만의 공유시간에서 멈추지 않고 지역주민, 학생 등 일반인들에게 오픈 스튜디오를 볼 기회를 제공해 함께 소통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이 기획자는 “도예레지던스 입주작가들에게 새로운 기법이나 프로그램 등을 아낌없이 알려준다. 인큐베이팅하는 것이 레지던스 운영 목적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부터는 도예뿐만 아니라 일러스트, 사진, 조소, 회화,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레지던스에 머물렀다. 작품 전시에서 벗어나 문학작가, 공연단체 등과 컬래버레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새로운 융복합을 시도하고 있다. 열정을 쏟은 만큼 성과도 좋다. 입주작가들이 대한민국미술대상전 대상과 성산미술대전 우수상, 보문미술대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기획자는 “상은 중요하지 않다”며 “작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옛 학교 본관에 들어서면 추억을 자극하는 300여 점의 민속품이 줄지어 관람객을 기다린다. 농기구부터 술잔, 오래된 전자제품을 보면 이야기꽃이 절로 피어난다. 전통도자기·생활도자기 전시실과 서예작품 전시실, 현대도예 전시실까지 볼거리가 풍성해 꽤 한참 동안 머물게 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도예가도 세상에 똑같은 도자기를 만들 수는 없다. 불의 온도나 방향, 흙 속에 숨은 티끌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개성이 중요시되는 오늘날 더욱 적합한 예술이 아닐까. 천편일률적인 체험이나 전시에서 벗어나 생동감을 느끼고 싶다면 ‘도자기 공룡군단’이 기다리는 이곳으로 발걸음해보길 권한다. 체험과 교육, 전시, 창작을 아우르는 이곳은 한 줌의 흙의 따스한 온기가 가슴에 스며드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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