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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출신 독립운동가 문영빈 선생 서훈 추진

배달학회 조직·임정 총무처 대변인 활동

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관련 자료 확인

기사입력 : 2019-04-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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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4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배달학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 총무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하동 출신 황남(篁南) 문영빈(文永彬·1891~1961·북천면) 선생을 임시정부 수립 100년 만에 재조명하고 서훈을 추진한다.

9일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해 3월부터 관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추진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시영·여운형 등과 활약한 하동 출신 문영빈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확인했다.

이번에 문건을 발굴·확인한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당시 언론보도와 선생의 손자 문여황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가 제공한 자료 등에서 선생의 활약상과 백산무역(주)을 통한 독립자금 지원, 한용운 선생이 결성한 만당(卍黨)에서 항일운동 등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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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에 의하면 문영빈 선생은 1914년 24세에 하동에서 김홍권(양보면·건국훈장), 강한조 선생과 함께 처자를 거느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1915년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배달학회(상해 임시정부 전신)를 조직하고 명예회장에 이시영(李始榮), 외교부장에 여운형(呂運亨), 총무부장직은 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총무처 대변인에 피선됐으나,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자금정조책(資金整調策)을 수립·계획하고 환국했다.

선생은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있던 전답 1000여 두락을 한성은행에 담보해 자금을 마련하고 안희제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을 설립,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로 참여하며 초대 상임 감사역을 맡아 독립운동에 힘썼다.

나라의 독립을 늘 우선시했던 선생은 분단된 조국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걱정하면서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하며, 남평과 강성의 문씨 대동보(족보)를 만든 후 1961년 71세에 생을 마쳤다. 김재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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