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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이끌다 이끌리다- 박영기(시인)

기사입력 : 2019-05-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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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 솟는 것들은 모두 찢는다. 죽순은 땅을 찢고, 나무의 햇순은 두꺼운 제 껍데기를 찢고, 신생아는 어미 자궁을 찢고….

빛을 받은 코가 빙산의 일각처럼 어둠을 찢고 서서히 솟아오른다. 이제 막 태어난 애벌레처럼 몸을 부풀려 공기를 들이마신다. 몸을 줄여 마신 공기를 내뿜는다. 영화 ‘향수’의 주인공 장 바스티스 그루누이가 태어나 처음 맡은 냄새는 생선 비린내와 시궁창의 악취다. 그가 처음 보고 들은 소리는 칼로 생선을 토막 치는 소리와 썩은 생선 내장에 꼬인 구더기다. 그리고 그의 첫울음 소리는 어미를 사형장으로 내몬다.

그가 세상을 느끼고 이해하는 방식은 오직 뛰어난 후각뿐이다. 어느 날 영혼을 빼앗겨도 좋을 향기에 이끌리고 만다. 이끌림의 순간은 이성의 개입이 전무한 상태. 다른 감각들은 정지하고 후각만 살아 있는 상태다. 40만 가지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는 코가 한 가지 냄새에 반응한 상태다. 그래서 이끌림은 고귀하다. 이끌림은 신성하다. 그의 이끌림은 행복하고 슬프다.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 나를 매혹한 향기는? 이끎에 끌렸던 기억은? 귀한 존재는 오래 남아 있지 않는다. 어머니의 젖 냄새는 휘발되고 기억이 까마득하다. 소나무 향이 번지던 사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입안 가득 아까시꽃 향을 퍼뜨린 버블 껌은 희망을 꿈꾸게 했다. 아, 벽장 속 케케묵은 서책에서 난 희미한 먹 냄새가 나를 시인으로 이끌었구나. 선명하든 흐릿하든 향기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 행복하다. 기억이 그때 그 시간과 장소로 나를 데려간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날씨는 흐렸는지 맑았는지. 그때 그 기억의 날들은 모두 대체로 맑았다.

최근 그날도 아주 맑았다. 하루에 한 번씩 오르던 길목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기만 했던 나무였다. 붉었으나 눈길 한 번 가지 않던 꽃이 있었다. 향기로웠지만 무심했던 냄새였다. 겨우내 앓고 있던 비염이 차츰 낫고 있던 즈음이었다. 꿀풀꽃, 봄까치꽃, 광대나물꽃…. 유난스레 꽃에 눈이 자주 가는 봄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끌리고 말았다. 먼저 코로 다음은 눈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해당화나무 곁에 서 있었다. 짙은 초록 잎이 햇빛을 받아 검게 빛나고 있었다. 잎과 잎 사이에서 저를 찢고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코를 닮은 꽃봉오리들이 무수히 솟고 있었다. 코끝을 내미는 것, 콧망울을 드러내는 것, 콧망울이 부풀어 오르는 것, 막 터지고 있는 것, 어느 시인은 만개한 꽃 속을 차마 못 보겠다고 했다. 자궁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남겨 두어야 할 것은 남겨두어야 그나마 신비가 남는다 했는데, 나는 그 신비를 훔쳐보고 말았다.

몸을 스윽 슬쩍 문지르며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옮겨 다니는 벌이 있었다. 꽃술에서 넘어졌다가 꽃술을 딛고 일어났다. 막대에 감기는 솜사탕처럼 다리에 꽃가루가 부풀고 있었다. 앞다리가 꽃가루 곤봉이 된 벌은 뒤뚱거리고 되똥거렸다. 꽃잎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고 다시 기어올랐다. 벌은 날개를 몇 차례 떨다 붕 뷰웅 날아갔다. 이끎과 이끌림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생존보존 방식이었다. 한 송이 꺾을까, 줄기를 들추었을 때 촘촘히 돋은 가시들이 허공을 흔적도 없이 찌르고 찢고 있었다. 물러나 있던 이성이 숨을 쉬도록 내 의식에 구멍을 뚫어 주었다.

해당화 향기의 첫 향은 달콤했다. 다음은 새콤했다. 그리고 씁쓰름하고 떫었다. 뒤끝이 아련하게 아렸다. 내 기억 속 향기는 병에 담긴 향수처럼 조금씩 빠져나간다. 영혼처럼. 아주 천천히.

박영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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