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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 이태희(양산경찰서 수사과 경위)

기사입력 : 2019-05-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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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사과로 갓 전입한 후배가 궁금한 게 있다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고소인은 현금을 빌려주고 여태 변제받은 사실이 없다 하고 피고소인은 그런 사실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둘 다 입증할 증거가 본인 진술 외에는 달리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란다. 무슨 엄청난 질문인 줄 알고 내심 긴장했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의심스러운 것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in dubio pro reo)’라는 형사소송법상의 대명제를 빗대어 답변을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 후배에게 범죄사실에 관한 적극적인 증명이 없으면 무죄가 된다고 설명하면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벌할 수 없는 실로 거룩하고도 숭고한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에 의거하여 ‘혐의 없음’이라 결론을 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후배를 보내고 난 뒤 이내 온갖 의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소인이 변제를 받았음에도 경찰서를 찾아오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고소를 하였을까. 비록 빌려준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갚았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것도 아닌데 정말 못 받은 것은 아닐까.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조금 전 후배와의 대화에서 나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의 확신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증거자료의 부존재’에 의해 ‘혐의 없음’이라고 판단했다. 애초에 돈을 차용해준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안 되었기 때문에 피고소인의 변제 여부를 따질 실익조차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사법적 진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몇 시간째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것은 이 사법적 진실이 과연 실체적 진실과 얼마나 일치하느냐라는 의문 때문이다.

실제 돈을 빌려준 게 맞는지, 빌린 돈을 변제했는지 여부는 고소인과 피고소인 둘만이 알 것이다. 객관적 사실은 신이 아닌 이상 당사자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이 당연한 명제를 깨트리고 객관적 사실, 즉 실체적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사관의 의무이자 숙명이라 하겠다.

흔히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라고 한다. 물증이 더 없는지, 물증을 찾기 위한 수사를 더 해야 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물증 없이 심증만 있다면 결국 ‘혐의 없음’으로 판단해야 되는 것이 수사관의 당연한 사법적 논리다. 객관적 증거자료만이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신의 영역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사법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의 완전 일치가 수사관의 오랜 염원이다. 수사관이 수사의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고소인의 절박함과 피고소인의 무고함만큼 수사관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정 또한 크다.

이태희 (양산경찰서 수사과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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