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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590) 제24화 마법의 돌 90

“황군은 패하지 않습니다”

기사입력 : 2019-05-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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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골짜기는 해가 짧았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불을 때는 나무를 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제가요.”

정식이 나무를 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라고 할 수 있나요? 차라리 학도병으로 나갈 걸 그랬어요.”

정식의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정식도 깊은 산골에서 지내는 것이 괴로워 보였다.

“무슨 소리야? 왜 일본의 전쟁에 나가?”

“내선일체라고 하는데… 학도병에 갔다가 오면 편하게 살 수 있잖아요?”

“내선일체 믿지 마라. 조선인은 삼등국민이라고 하지 않냐? 조선은 식민지일 뿐이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언제 끝나?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겠냐?”

“세상이 변해요?”

“전쟁이 끝나는 건 일본이 망하는 거다.”

“예?”

정식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일본인들은 물론 조선인들도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정식은 일본이 망한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재영이 일본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시마무라 때문이었다. 이재영은 경찰서에서 석방되자 경성에 올라가 시마무라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일본이 패하고 있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시마무라는 술에 취하자 중국에서 전쟁을 벌인 이야기를 했다. 중국인을 무수히 죽이고, 다리가 없는 개천에 중국인의 시체를 쏟아붓고 시체 위를 트럭을 타고 건넌 일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술자리에 참석했던 일본인들은 환호했다.

“일본군이 전 세계 최강인지 알아? 우리는 미국과 싸우면 안 되는 거였어. 전쟁에 지면 일본이 비참해질 것이다.”

시마무라가 말했다. 좌중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황군은 패하지 않습니다.”

시마무라가 술을 마시는 자리에는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 장교들도 있었다. 그들은 시마무라를 영웅처럼 존경했다. 그러나 시마무라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자 눈빛이 싸늘해졌다. 일본군 장교들은 황군은 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할 수 있다.”

시마무라의 말은 일본군 장교들을 불쾌하게 하여 그들이 총총히 술집을 떠났다. 이재영은 시마무라의 집까지 택시를 타고 바래다주어야 했다.

“어머, 어떻게 해요?”

나츠코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시마무라를 침실에 눕히고 대문 앞으로 따라 나왔다.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나츠코는 쓸쓸해 보였다. 이재영은 그녀를 가만히 살폈다.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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