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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마산 방어전투를 아십니까?- 이경민(진해희망의집 원장)

기사입력 : 2019-05-29 20: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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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1950년 여름철 진해의 장복산 너머서 대포소리가 들렸고, 이때 인민군이 마산의 진동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은 온갖 짐을 싸고 피란 갈 준비를 했다. 남쪽 끝 진해에서 배를 타고 피란 간다면 난민 신세가 되지 않나 혼자서 생각한 적도 있다. 그때 가족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들이었다.

최근 필자는 69년 전 대포 소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2018년에 출간된 〈마산방어전 루트를 찾아서〉(손담, 배대균 공저)이다. 대포 소리는 진동리와 함안 일대에서 6·25 전쟁사에서 가장 길고, 수많은 희생자를 낸 처절한 전투 소리였다. 마산방어전투는 6·25전쟁을 대표하는 60대 전투의 기록에서 빠졌다고 한다. 저자 배대균 박사는 제대로 된 국가 기록이 없어서 현재 미 육군 기록보관처에 요청해서 당시의 자세한 전투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1차로 그는 그간 단편들의 기록을 찾아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주변에서 증언들을 모아 당시 치열했던 45일간의 전투를 재구성했다.

당시의 전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남침으로 불과 한 달여 만에 파죽지세로 낙동강에 이르렀고, 그러나 신속한 UN군의 참전으로 드디어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됐다. 우리 국군은 빈약한 전투장비로 포항의 기계면에서 영천을 거쳐 왜관의 다부동까지 방어선에서 혈전을 치렀고, 왜관에서 마산까지는 미군이 방어했다. 국군과 미군에 의해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어려워지자, 북한군은 마산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유는 마산은 부산과 50여km 거리였고, 부산은 유일한 UN군의 참전 루트이고 보급항만이자 임시수도였기 때문이다. 마산이 뚫리면 전쟁은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 전투가 마산방어전투였다. 전투에서 아군은 1000여명이 전사하고 3000여명이 부상했으며, 적군은 4000여명이 죽고 3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마산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은 조선족으로 구성된 팔로군 중국공산당 주력부대로서 사단장 방호선이 이끄는 전투경험이 많은 최정예부대였다. 이들은 개성 쪽에서 서울로 진격한 최일선 부대였다. 이들은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 방면에 갑자기 출현했다. 당시 마산 부근의 낙동강 전선 방어부대는 미 제24사단이었다. 진주가 점령됐다는 예기치 못한 급보에 UN군 사령부는 7월 30일 미 제25사단의 2개 연대와 한국군 600여명의 민기식 부대와 500여명의 해병대 김성은 부대 및 전투경찰대를 급파했다. 마산이 뚫리면, 부산항을 통해 UN증원부대가 도착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8월 1일부터 45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더위 속의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지역은 함안과 진동리, 진주와 고성 방면까지 이른다. 특히 마산 진북면 서북산은 19번이나 뺏고 뺏기는 혈전의 고지탈환전이었다. 현재 그곳 정상에 1995년 미 제8군사령관 티몬스 중장, 육군 제39사단장, 그리고 주민들이 세운 전적비가 있다. 당시 티몬스 중장의 아버지, 티몬스 대위는 1950년 8월 23일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서북산에서 전사했다. 열약한 무기로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든 김성은 부대의 맹활약은 한국전사에 길이 남는다. 김성은 중령(창원 출신)은 미군들이 포위된 전투에 급파해서 구출작전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김성은 해병대는 북한군이 마산을 뚫을 수 없자 통영 우회 기습공격으로 부산 돌파를 시도하지만, 한국군 단독의 통영상륙작전으로 막았다. 그 외에 치열했던 격전의 전투현장이 수다하다.

금년 5월은 마산항 개항 120주년이다. 마산은 조선말 서양개화의 물결로부터, 러일전쟁, 3·1독립운동, 6·25전쟁, 민주화운동, 산업화 등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부에 서있다. 다음달 6월은 호국의 달이다. 우리는 마산과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는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경민(진해희망의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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