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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기억의 끄트머리- 이경주(시조시인·사진작가)

기사입력 : 2019-05-30 20:18:42

바람마저 불지 않는다면 참 견디기 힘든 하루이다. 매해를 지나올수록 이르게 여름이 찾아온다. 예전 담정(庭) 김려(金)가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원·부령·진해 등지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한 적 있다. 그는 남해안 진해에서 1801년부터 아침저녁으로 발품을 팔아 1803년에 탈고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그 지역에 사는 물고기 53종, 게와 패류 총 19항목을 기술하였다. 내용 중에 멸치(정어리 포함)를 말자어(末子魚)라고 소개하면서 서울의 멸아(兒)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실상은 다르다고 생각되나 김려가 강원도에서 들은 바로 멸치는 물고기의 이종(異種)으로 보고 “장기(氣)와 남기(嵐氣)”의 기운으로 생긴 물고기라고 하며, ‘내가 일찍이 관동 지방의 바닷가 사람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멸치도 역시 장기와 남기의 기운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매번 덥고 안개가 끼어 어두운 때에 조수(潮水)가 솟구쳐 오르는 곳으로 가 삼태기로 떠서 잡는다고 한다. 내가 들은 것은 대개 이러한 종류의 말이었다’고 되어 있어 멸치는 요즘같이 날이 더워지고 장마철이 오는 습한 날씨에 많이 잡히며, 이러한 특성으로 장려병(病)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본토박이는 이를 많이 먹지 않고 어류가 귀한 인근의 함안·영산·칠원 지방에 내어다 판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그물 등 어구 수준으로서는 멸치 같은 작은 물고기를 잡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멸치의 보존과 저장방법이 발달하지 않아 당시에는 천대받고 멸시를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멸치가 산업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의 척박한 땅에 양질의 거름으로만 사용되다가 태평양전쟁 때에는 어유(魚油)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처럼 국민반찬이 된 것은 겨우 한 세기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오월에 개항한 마산항은 많은 얼굴을 달리하고 있다. 당시의 마산선창, 동굴강과 서굴강은 차츰 매립되어 지금에는 작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 그 주변에 있는 어시장도 조선시대에는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3대 수산물 시장이었다지만 지금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활어회를 파는 식당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개항과 시장 활성화를 위해 주변 도심에서는 최근 지자체와 문화단체들에 의해 ‘새물맞이’ 등 많은 문화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시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는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이 있다.

역사는 기록되어져야 기억할 수 있다. 그것이 역사가에 의해서 씌어지든, 예술가의 작품으로 남든지 말이다. 그런 연유로 마산탐색전 ‘거가, 어디고’는 열렸다. 또한 창원의 대표문인인 김용호, 김태홍, 이선관의 작품세계를 모티브로 하여 창원의 미술작가 18인이 그들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 ‘2019 별에게 말을 걸다 전’은 큰 울림을 준다. 앞으로 이러한 예술장르를 뛰어넘어 융합하는 예술 콘텐츠의 기획은 지역문화를 활성화하고 예술인의 창작의지를 고취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예술 활동과 더불어 지금의 경관과 생활상을 비롯하여 변해가는 해안선의 모습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은 지금의 우리 세대가 해야 할 몫이자 의무인 것이다. 다시 100년을 기억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이경주(시조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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