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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을 통해 배우다] (2) 문태수 의병장과 남상덕 참위를 아십니까?

나라 향한 뜨거운 충절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빛났다

기사입력 : 2019-06-27 20:50:01

TV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의병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실력 양성이나 외교적 노력이 아닌 총칼을 들고 직접 적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의병들의 활약과 그들의 신념을 보여줬다. 극 중에서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맥켄지가 경기도 양평군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찾아가 그들을 촬영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촬영된 사진은 ‘조선의 비극’이라는 맥켄지의 글 속에 소개되었고,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교사들이 수업 중에 활용하는 자료가 됐다.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맥켄지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대한제국의 고종은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군대를 해산하는 과정이 ‘미스터 선샤인’ 중에 묘사됐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을 하자 그 부하들과 제2연대 제1대대 소속 군인들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군대해산에 항거하며 1907년 8월 1일, 서울의 하늘을 총성으로 가득 채웠다. 이때 남상덕이라는 제2연대 제1대대 소속 참위가 일어나 부하들을 독려하며 1000여명과 함께 일병들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 남상덕 참위가 의령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청했다면 또 다른 감동이 전해졌을 것이다.

국가보훈처 기록에 남아 있는 남상덕(왼쪽 세 번째) 참위 사진./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 기록에 남아 있는 남상덕(왼쪽 세 번째) 참위 사진./국가보훈처/

대한민국의 훈장은 1973년 개정을 거쳐 만들어진 상훈법에 의하면 11종으로 무궁화대훈장·건국훈장·국민훈장·무공훈장·근정훈장·보국훈장·수교훈장·산업훈장·새마을훈장·문화훈장·체육훈장이다. 이 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에게 주어지는 것은 건국훈장이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으로 구분되며 그 아래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이 있다. 대한민국장에는 중국인을 포함해 30분이 추서받았으나, 경남 출신자는 단 한 분도 없다. 92분이 추서받은 대통령장에는 두 분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남인들은 이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그분들을 수업시간에 언급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정부수립 100년을 맞아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 또한 남겨진 우리들의 의무라는 생각에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한말(대한제국 말기)의 의병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으로 인해 유생들이 주도했던 을미의병, 을사늑약으로 인한 을사·병오의병, 그리고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등장한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정미의병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돼 서울로 진격하는 등 전술과 전략 면에서 군대와 군대의 싸움으로 발전했다고 해 의병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군대해산 이후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했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들 정미의병 중 큰 공을 세워 정부로부터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경남 출신 두 분을 통해 ‘기억하는 것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의 의무’임을 또다시 상기하고자 한다.

◆지리산 정기를 받은 함양의 큰 별 의병장 문태수(文泰洙)= 문태서로 더 알려진 문태수는 문익점의 24세손이며 1880년 함양군 안의면(당시 안의군 서상면)에서 태어나 의병으로 활동하다 1913년에 순국한 대표적 의병장이다.

러·일전쟁 후 병법을 연구하다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참여했고, 1907년 양주에서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에 의병 100명을 이끌고 호남의진의 대표로 참여했으나 1908년 서울 진공에 실패한 후 고향인 안의에 내려와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함양군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킨 그는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 부근에서 3월 14일 일본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이 신기(新基)전투에는 일본군 함양 수비대 제5중대 소속 가와라(川原) 특무조장 이하 7명이 참여한 것으로 문태서의 병력은 10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 측의 피해는 없었으나 의병 5명이 사망한 것으로 일본 측 문서에 전하고 있으며, 당시 문태수는 칼을 차고 있었고, 나머지 의병은 모두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909년 5월 8일 덕유산 문성전투에서 13명이 사망하고 부장인 박춘실을 포함한 9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일본군 함양수비대가 수차례 벌였던 덕유산 의병대에 대한 ‘토벌작전’ 중의 하나였다. 이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해 무주주재소 및 장수읍을 습격하고 주재소와 관아에 불을 지르는 등 항전을 계속했다.

1909년에는 대덕산중에서 안의 방면으로 이동해 활동하며 4월에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에서 적을 습격하는 등 공을 세우자 무주 주민들이 ‘갈충보국 하제만민위국의병대장 문태서지비 명진사해 난진기덕 무신 사월 일’이란 비를 세웠으나 일제 경찰이 이를 철거했다. 5월에는 남원군에서 적과 교전하고 8월에는 충북의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도 활약했다.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이후인 10월에도 이원역을 습격해 일경을 포로로 잡았으며, 11월 이후에는 무주에서도 주로 활동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매부의 집에 머물던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수감 생활 중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했다. 그의 생가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졌고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2010년)됐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세워진 문태수 의병장 생가 터 표지석.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됐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세워진 문태수 의병장 생가 터 표지석.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됐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문태수 의병장 생가 입구에는 고암 김성진이 노래한 추모비가 서 있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문태수 의병장 생가 입구에는 고암 김성진이 노래한 추모비가 서 있다.

의병장 문태수에게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꿇고 사느니 서서 당당히 싸운 대한제국 참위 남상덕(南相悳)= 남상덕은 군부 시위대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 입대해 견습 보병 참위가 됐다.

1907년 7월 31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일제의 야반 장곡천(長谷川)이 순종을 급박해 군대해산 조칙 재가를 강요했고 결국 해산령이 내려졌다. 8월 1일 해산식을 준비하던 이완용과 이병무는 폭동에 대비해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알렸다.

해산 소식을 알지 못했던 각 대장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비분을 금할 수 없었으나 독기로 가득한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각 부대로 돌아갔다. 해산식 당일 종로와 덕수궁 대한문 양측에는 일군이 기관총을 설치해 거리를 겨눈 상태였다. 먼저 기병대가 도착하고 제1연대 제3대대가 도착했다. 제2연대 제3대대, 공병, 포병이 훈련원에 들어오는 오전 9시 10분,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해 봉기한 것이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겨우 해산식이 거행됐으나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하고 은사금으로 주어진 지폐를 찢어버리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다.

이날의 광경을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날은 흐리고 부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 아 훈련원은 국가 500년 강무의 장송이며, 오늘날의 군인들도 다년 뛰면서 무예를 익힌 곳인데 갑자기 오늘따라 헤어져야 하니 하늘인들 슬퍼하지 않겠는가!”

해산식이 있던 날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까우랴’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총성을 듣고 달려간 당번병은 “대대장 자문(自刎)”이라 크게 외쳤다. 이에 부하들은 무기고를 탈취해 총기와 탄약을 되찾은 뒤 일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제2연대 제1대대원들도 무기고를 점령해 총기를 되찾았다.

참위 남상덕은 “윗 장교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내가 어찌 홀로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그들 적과 더불어 일사전(一死戰)을 결(決)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겠노라”며 총을 들고 부하들과 더불어 일군을 공격했다. 칼을 빼어든 그는 사격을 지휘하면서 사병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남은 군대는 각자 흩어져 정미년 8동의 의병으로 다시 일어났다고 ‘기려수필(남상덕조)’에서 말한다.

이날의 전투를 맥켄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의 용감한 방어는 심지어 적들에게까지도 대단한 존경심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사이에 일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한국과 한국 사람에 관해서 말해온 이상으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게 된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모범적인 모습으로 끝까지 항전한 남상덕은 애국적인 한국군 장교의 모범이 됐다고 ‘독립운동사’ 제1권 의병항쟁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고향 의령에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의령문화원이 중심이 돼 남상덕 참위에 대한 연구가 진행돼 자랑스러운 의령인으로서 백산 안희제와 함께 널리 알려지는 그날을 소망한다.

남상덕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의병들의 항전은 1915년 마지막 의병장이라 불린 채응언의 체포, 교수형으로 막을 내렸으나, 그들의 투쟁은 비밀결사의 모습으로 유지됐고 의열투쟁과 1920년대 무장투쟁으로 연결됐으며 광복의 순간까지 적과 싸운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으로 이어졌다.

밀양고등학교 교사 최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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