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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해주의 고려인과 최재형 선생을 기리며- 구자도(신창기계(주) 대표)

기사입력 : 2019-07-17 20:27:09

지난 6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은 킹크랩 먹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더욱이 냉전시절 절대 가볼 수 없었던 러시아 땅이 아니던가! 경남대 행정대학원 부동산금융최고관리자 과정 27기 졸업생들은 고려인의 역사를 보기 전까지는 먹거리와 볼거리 이야기로 신났다. 그러나 정작 여행을 하면서는 고려인의 삶과 애환으로 빠져들었다.

가이드는 고려인 강제 이주의 시발역인 라즈돌리노예역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1937년 스탈린이 일본 스파이 활동을 명분으로 모든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역이다. 척박했던 연해주를 옥토로 바꾸고 도로를 닦았으며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때 17만5000명의 고려인 중 2500여명이 처형당했으며, 이주 과정에서 1만5000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가족을 묻지도 못하고 떠나야 하는 고려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다음 행선지는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1863년 고려인 13가옥이 최초로 연해주에 정착했다. 이들은 그 당시 대흉년과 기근을 피해 황폐했던 이곳까지 건너와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869년에는 9살의 최재형이 부친을 따라 이주했는데, 11살 때 형수의 구박을 못 견뎌 가출했다. 해변가에 쓰러진 최재형을 구한 것은 러시아 상선의 선장이었다. 선장은 최재형을 양아들로 삼아 표트로 세묘노비치 최라 부르며, 러시아어는 물론 고전문학 등을 가르쳐 주었다.

사업으로 자산가가 된 최재형 선생은 이후 고려인을 위한 교회와 학교 설립 및 장학금 지원은 물론, 항일투쟁을 위한 의병조직에 나서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됐다. 부총장에는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등이 선출됐고, 이때 안중근 의사도 합류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러 떠나기 전 최재형 선생의 집에 머물며 사격연습을 했다.

일본군은 눈엣가시 같은 최재형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음모를 꾸미며 압박해 갔다. 이에 굴하지 않고 최재형 선생은 1911년 한인자치기관 권업회 회장,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 선임 등의 활약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최재형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고려인이 없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러시아 및 고려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최재형 선생도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무참히 총살되고 말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최재형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근 언론에 일본과의 외교·통상 갈등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근대 시절 모진 고초 속에서도 연해주를 개척했던 고려인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됐던 최재형 선생을 추모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우리는 고려인의 강인성과 최재형 선생의 애국 정신을 기리고 있는가? 기업인으로서 나는 사업보국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구자도(신창기계(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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