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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한일 갈등과 미국 없는 세계- 허승도(논설실장)

기사입력 : 2019-07-31 20:33:47

최근 미중 무역전쟁과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한국 보복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책이 ‘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다.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이 쓴 이 책은 셰일혁명으로 석유자원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미국이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분석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시장도 경찰도 아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대로 미국이 세계질서 유지에 관여하지 않게 되면 에너지 공급과 해상운송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 세계를 산산조각 낼 3개의 전쟁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3개의 전쟁은 러시아와 유럽 간 지구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페르시아만 전쟁, 중국과 일본의 유조선 전쟁이다. 중국과 일본이 남중국해와 동남아시아의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해상전에 돌입하게 된다면 한국은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까? 저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여 중국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고 일본을 선택하면서 미국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유지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해외시장으로의 수출과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질서가 무너지면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금과 같이 한국과 일본 간 갈등이 확산될 때 미국은 누구를 선택할까?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시곗바늘을 114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이 협약으로 일본이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 정부는 과거와 같이 계산기를 두들겨 자국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선택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국방부 보고서에서 미·일동맹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으로 다룬데 비해 한·미동맹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축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 눈을 돌려보자. 일본이 우리의 주력업종과 대표기업의 급소를 파악하여 반도체 세정에 사용하는 불화수소와 감광제인 리지스트, 플루오린폴리이미 등 3개 품목에 대해서 수출 규제에 나선데 이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 추가적인 보복조치를 예고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다. 경제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일 무역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만 손해 비율은 한국이 80이고 일본은 20으로 우리의 피해가 훨씬 심각하다고 한다.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당장 이달 하순부터 857~1115개 전략물자의 수출 규제로 우리 산업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대책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알리는 여론전, WTO를 통한 분쟁 해결, 미국의 중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다 민간 중심의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으로 일본 압박 작전을 펴면서 중장기 방안으로 소재산업 육성과 수입 다변화를 통해 일본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국제 여론전과 미국의 중재 요청 외에는 장기대책이라는 것이다.

여권 일부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 주장을 하는 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라고는 하지만,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미일동맹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미국이 한국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 WTO 제소로 인한 해결도 최소한 2~3년이 걸린다. 종합하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미국 없는 세계’를 염두에 두고 한일간 외교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경분리원칙을 무시하고 한국에 경제 보복을 하는 일본의 졸렬한 행동을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기업과 국민의 희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 국민이 고난의 행군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허승도(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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