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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사천 신복마을 박연묵교육박물관장 박연묵 씨

평생 모은 소중한 일상, 경남교육·생활 역사 되다

1960년대 말 ‘전국적 교사 품귀 현상’

기사입력 : 2019-08-01 21:10:20

‘역사가 풍부하다’는 말은 과거 그 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얼마나 기록으로 남았냐는 말과 같다. 아쉽게도 해방 이후 우리의 기록은 전쟁과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온전히 보전되지 못했다. 때로는 물리적 힘에 의해 버려지기도 했고,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기록들은 무방비 상태로 소홀히 취급됐다. 최근에서야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기 위해 기록을 찾는 일에 몰두하지만, 흩어진 기록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교사 시절의 집에서 자료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교사 시절의 집에서 자료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공공영역에서 잃어버린 기록의 공백을 자신의 기록물로 채우는 이가 있다. 사천시 용현면 ‘박연묵교육박물관’의 박연묵(86) 관장이다. 박물관 명칭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박물관에 담긴 물건 하나하나가 그를 떼어 놓고는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기, 민주화를 겪으며 30년 동안 교단에 섰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박연묵교육박물관에는 한 세기에 가까운 역사가 오롯이 축적되어 있다. 그가 남긴 기록들은 더 이상 ‘박연묵’ 개인의 소장품이 아니다. 경남 교육·생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장./김승권 기자/
박연묵 교육박물관장./김승권 기자/

사천 시내에서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용현면 신복마을에 닿는다. 마을 어귀에서 굽은 골목을 따라가면, 박 관장이 평생 지내온 안채를 중심으로 10개의 전시관이 빙 둘러 있는 박연묵교육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특정 건물이 아니라 10개의 전시관, 수목원, 주변 풍경의 집합체다. 1943년에 대들보를 건 안채와 마주하면 이 역시 박물관의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박 관장이 교육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조금 특별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 말을 즈음해 전국 공업단지에서 인력 수요가 폭발했고, 당시 교직에 있던 인력이 다수 유출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전국적 교사 품귀 현상’이 일었다. 당시 정권은 진주교대에 초등교원양성소를 설치해 임시 교원을 배출했다. 그는 18주 교육을 받아 초등 교원으로 배치됐다. 임시 교원이던 박 관장은 진주나 마산 같은 중심지 근처에는 가지 못했다. 통영·거제 도서 지역에서 배를 타고 섬을 돌며 순회 강사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의 병원선 같은 역할이었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제자들의 방에서 담임시절 학생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제자들의 방에서 담임시절 학생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 관장은 “소속은 통영 노대국민학교였지만 오늘은 이 섬, 내일은 저 섬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헌법에 명시된 의무교육이지만 한 섬에 2~3명 있는 곳은 사실상 교육이 어려워 순회 강사를 뒀다. 그게 교직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박 관장은 사천과 고성 등지에서 교직 생활을 이어갔고 1999년, 31년간 몸담았던 교단을 떠났다. 한평생 교단에서 남긴 것은 제자들의 빛바랜 사진과 교직 생활을 여과 없이 기록한 방대한 기록물이었다. 학창 시절 교과서부터 편지, 안내장, 사진물, 제자들의 글짓기 원고까지.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남겨 둔 것이 2006년 문을 연 박연묵교육박물관의 모태가 되었고 ‘교사시절의 집’에 고스란히 남았다. 전시관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의 묵직한 향기가 비집고 나왔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봐 왔던 일본 교과서부터 광복 이후, 6·25 전쟁 이전 교과서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교과서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삽화 주인공이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으로 박 관장은 교과서의 변천 과정이 곧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어디서 구할 수 없는 교재들이 훼손될까 봐 딱 보기에도 듬직한 오동나무로 직접 틀을 짜 보관하고 있었다.

‘교사시절의 집’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곳은 우편물 함이다. 월별로 나눠진 보관함에는 편지부터 시작해 청첩장, 안내장 등이 빼곡했다. 사람들에게 받은 우편물을 하나 버리지 않고 기록하고 남겨놓았다. ‘맑고 높은 청명의 가을. 수많은 장별 속에 기록기의 열로 지어서 날라가는 모양은…’ 친구가 부산으로 전학 간 뒤 받은 생의 첫 편지였다. 그는 답장을 보낼 때 반드시 원본과 사본 2통을 작성했다. 한 장은 편지 봉투로, 한 장은 ‘편지 원안’ 철에 끼웠다. 단순 계산해도 편지 한 통을 쓰는 노력의 곱절이 들어가지만, 그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김승권 기자/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김승권 기자/

학교 다닐 때 보던 교과서와 서적을 모아 놓은 ‘학창시절의 방’에 들어서자 박 관장은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펼쳐 보이며 비밀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정음사에서 나온 국어 교과서로 책 안쪽에는 일부 페이지가 찢긴 흔적과 함께 검은색 사인펜으로 페이지에 있는 단어를 보이지 않게 지운 자국이 있었다.

그는 “조회 때 담임 선생님이 국어책을 내라고 했다. 사이에 있는 4단원을 찢어서 냈다. 뒤쪽 내용 때문에 찢지 못하는 페이지는 먹칠로 가렸다”면서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묻지 않았고 선생님도 설명하지 않았다. 추정하건대 검인정 교과서가 발간됐지만 글을 쓴 사람이 정치적 이념 때문에 혹은 입북을 해서 삭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치적 혼란기를 잘 보여주는 교과서다”고 했다.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발간된 ‘한국의 동란’이라는 책을 내보이며 당시 정치적 상황을 회상하기도 했다. 책장 빼곡히 꽂힌 서적의 역사성에 무의식적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그의 일기장이었다. 1949년 그가 진주중학교 유학 당시부터 70여년간 써 내려간 일기장이 보관돼 있었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삶이, 교육 현장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한 10개의 전시관이 애초부터 전시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기록이 쌓일 때마다 한 채, 또 한 채 늘려갔다. 지금의 기록물, 서적이 있는 자리는 과거 가축과 여물통이 있던 자리다. 소와 염소, 돼지 등을 키우던 축사의 기능은 점점 축소됐고, 박 관장의 기록물과 소장물은 늘어갔다. 그 당시 가난이라는 공통된 경험은 작은 물건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사소한 일상을 기록함으로써 의미 있는 하루를 써 내려 갔다. 겹겹이 쌓인 기록물과 소장품은 8700여점에 이른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제자들의 방에서 담임시절 학생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연묵 교육박물관장이 사천시 용현면 신복마을 교육박물관의 제자들의 방에서 담임시절 학생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는 “기록이 쌓여가니까 소마구를 개조해서 전시관을 만들었다. 블록을 쌓고 시멘트를 직접 발랐다. 돈이 부족해서 번듯하게 짓지는 못했다. 교사가 무슨 돈이 있겠나. 형편대로 쌓고, 쌓다가 지금 형태로 됐다. 다른 박물관보다 발전 템포는 상당히 느리다”고 했다.

10개 전시관 가운데 제일 애착이 가는 곳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박 관장은 난감한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던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추억의 집’에 자리한 ‘제자들의 방’을 꼽았다. 이곳에서는 교육 철학은 물론 박 관장이 기록을 대하는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제자들의 방’ 한쪽에는 교사 생활을 하며 가르쳤던 모든 제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진 명부였다. ‘담임한 학생명부’를 만들어 놓고 단체 사진의 실루엣을 그림으로 그린 뒤 번호를 매겨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입해 놓았다. 이름을 모두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어디에도 없고, 뒤늦게 다시 만들 수 없는 귀중한 기록이었다. 전시실 한쪽에는 제자들이 글짓기 한 원고를 모아놓은 자료도 눈에 띄었다. 그는 “처음 담임을 맡을 때부터의 제자들 사진을 직접 찍었고 다 이름을 붙여놨다. 추억에 중점을 뒀다. 제자들도 찾아오고, 그들의 자식들도 같이 와서 보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한 자료지만, 그 당시에 기록해 놓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고 했다. 빛바랜 사진들 위로 그의 교육 철학인 ‘사랑, 인연, 추억’이라는 세 단어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박 관장은 2011년 이 ‘제자들의 방’에서 국가기록원장으로부터 직접 감사패를 건네받았다. 민간 기록물 관리의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박 관장이 평생에 걸쳐 남긴 기록들은 꼼꼼하고 촘촘했다. 10개의 전시관을 돌며 설명을 듣는 데는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그는 기록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있다고 했다. 기록에 대한 의지가 강할 것, 이사를 하지 말 것, 넓은 공간을 가질 것. 평생 이곳을 지키고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면서 두 가지 요건은 충족했다. 기록 관리에 대한 의지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로 인해 자칫 기록 관리에 소원해질까 봐 스스로 우려했다. 그의 바람은 박연묵교육박물관을 다음 세대에 오롯이 물려주는 것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박연묵이 설명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 차이다. 돈이 되는 자료는 아니지만 연필 한 자루 아껴가면서 꼼꼼히 기록하고 모아온 귀중한 자료다. 자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제대로 관리해주고 다음 세대로 잘 전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전까지는, 힘닿는 데까지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박물관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기원 기자 pkw@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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