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함양 안의에 놀러오세요- 김태희(실학박물관장)

기사입력 : 2019-08-06 20:13:00

지난달 하순, 경남 함양과 안의를 다녀왔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함께 공부하는 동학들의 답사였다. 안의는 연암이 50대 후반에 5년간 현감을 지낸 곳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서울을 떠나 시외버스로 함양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그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이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學士樓). 연암의 ‘함양군 학사루기’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이 이곳 수령으로 있으면서 누각을 만들었다. 백성들은 그가 세운 누각을 ‘학사루’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시호인 ‘문창후’나 자인 ‘고운’이란 이름보다 직함인 ‘학사’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를 누각에서 언제든 만날 듯이 여겼기 때문이라고 연암은 해석했다.

학사루에서는 현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김종직이 40세에 함양군수로 부임했는데, 유자광이 지은 현판을 보고 불태워버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유자광은 분을 삭이며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관아의 건물은 함양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관아 부속건물이었던 학사루는 길 건너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는데, 학사루 옆에 김종직이 심은 느티나무는 지금까지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상림(上林). 이 숲은 최치원이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의 역사인물 공원에는 ‘열녀학생임술증처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라고 쓰인 비석이 있었다. 함양으로 출가한 박씨는 안의 출신으로, 요절한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자진했다. 연암은 ‘열녀함양박씨전’이라는 글에서 박씨를 열녀라고 기리면서도, 과부 어머니의 아픈 이야기를 통해 열녀를 강요하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다른 편으로 선정비가 줄지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병갑 선정비가 있었다. 나는 그의 선정비를 전북 정읍시 태인의 피향정에서도 보았다. 조병갑은 동학 농민 봉기를 촉발시킨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함양에서는 그 선정비의 존치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로서 선정비는 그대로 두기로 하고, 대신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문을 옆에 세워 두었다.

연암이 떠난 안의에서도 그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연암은 말렸다. 사람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수고 주모자는 감영에 고발하겠다고 전했다. 선정비니 송덕비니 하는 것은 민폐였다. 선정(善政)보다 학정(虐政)의 징표가 될 수 있었다.

안의에 가서는 광풍루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벽돌로 지은 하풍죽로당 등 연암의 기록에 있는 관아 건물들은 볼 수 없었다. 그 자리엔 대신 안의초등학교가 있었다. 한쪽에 있는 사적비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본디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는 법인사와 내아(內衙)였다는 허삼둘 고택을 둘러봤다.

물레방아나 벽돌과 같은 물건과 기술에서 실학자의 면모를 찾는다. 그러나 실학자의 진면목은 이것만이 아니고, 선정비나 열녀비에 담긴 고루한 인습과 허위의식을 질타하는 비판정신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일 것이다.

물레방아 공원 계곡에 있는 시원한 용추폭포를 찾는 걸로 하루 일정을 마칠 수 있었는데, 더하여 일두 정여창 고택까지 둘러보았다. 이튿날에는 승안사(昇安寺) 터의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 정여창을 배향한 남계서원, 그리고 교수정(敎授亭)까지 둘러보았다.

밀도 있는 답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운전하며 안내해준 함양문화원 김윤수 부원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일행은 ‘고반재(考般齋)’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에 종림 스님이 직접 지은 아침밥을 얻어먹고, ‘천년지장(千年之藏)’과 소장품을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연암 선생은 지인들에게 안의로 놀러오라고 했다. 연암의 자취를 찾아 간 그곳에서, 김윤수 선생, 종림 스님의 환대로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함양, 안의에 가면 좋은 풍광과 오래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삶의 터전에서 자신의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