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이야기가 있는 공간 (36) 창원 양덕성당

거친 붉은 벽돌 틈새, 우리네 40년 삶과 애환 스민 곳

기사입력 : 2019-08-08 21:34:04
지난 1978년 지어져 노동자들과 주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온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성당’.
지난 1978년 지어져 노동자들과 주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온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성당’.

어떤 건물이든 발자취를 좇아가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짓게 된 배경에서부터 건축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 사용하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모두 건축물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축의 구성요소 3가지로 구조, 기능, 아름다움을 말한다. 3개 요소를 모두 갖춘 ‘양덕성당’을 찾아 건물에 깃든 이야기들을 만났다. 이번 나들이에는 성당의 오래된 신자이자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황광지 수필가가 동행했다.

양덕성당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그 시절 시국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970년대 초반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돼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양덕동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가까워 가난한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일에 지친 젊은이들에게는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정서적 안정과 마음을 의지할 안식처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1975년 국립마산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평신도 동정녀 하마리아와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 소속으로 대구 근로자복지회관 JOC 지도신부로 있던 박기홍(Josef Platzer) 양덕 본당 초대 주임신부가 뜻을 모아 회관을 시작하고, 회관 안에서 본당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렇게 지어진 것이 양덕성당 인근 가톨릭여성회관이다. 마산교구의 재정이 여의치 않아 하마리아의 본국인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와 부인회의 도움으로 건물을 지었다. 가톨릭여성회관은 한자교실, 한울학교 등을 운영하며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마음 붙일 곳이 돼주었다. 회관은 여전히 노동문제상담소, 가정폭력상담소, 환경운동 연대, 이주여성 지원사업을 운영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양덕본당은 이보다 앞서 1975년 12월 상남동 성당에서 신자 650명으로 분리돼 설립됐지만 건물 없이 가톨릭여성회관에서 더부살이를 하다 1978년 현재 위치에 성당이 들어섰다.

박기홍 신부는 당시 본당의 특징으로 ‘노동자 본당’이라 말했다. 노동자, 회사원, 선생님 모두 책상에 둘러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JOC(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 신부는 지난 2001년에 나온 ‘양덕성당 25년사’에서 부지 매입 당시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그는 “부지를 사고 계약에 서명을 마치고 며칠 후 성당 근처에 마산역이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며 “한 주 만에 땅값이 두 배로 치솟았고, 일 년 뒤에는 열 배로 뛰었다”고 커다란 행운이 따랐다고 회고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다움과 경외로움에 경탄이 절로 난다. 벽돌로 이뤄진 수직 덩어리들이 모여 상부에서 가운데로 수렴되는 비정형 모양을 띠고 있다. 특히 빨간 벽돌이 주는 이미지가 상당한데, 아랫부분은 깬 벽돌을 쌓아 거칠고 강한 질감과 안정감을 주고 윗부분엔 온전한 벽돌로 처리해 떠받쳐 솟은 느낌을 준다. 황 수필가는 “성당을 지은 김수근 건축가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라고 말했다고 해요”라며 “당시엔 공장이나 낮은 주택, 공터들 뿐이었으니 그 사이 우뚝 솟은 십자가 탑과 성당 건물이 더욱 그래 보였겠네요”라고 말했다.

깬 벽돌로 쌓은 외벽.
깬 벽돌로 쌓은 외벽.

양덕성당은 신자뿐 아니라 건축학도들도 자주 찾는다. 한국 근현대사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1931~1986년) 건축가의 첫 종교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황 수필가는 “서울에 있는 불광성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양덕성당과 쌍둥이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두 성당은 뾰족한 첨탑의 형태로 모습이 같다. 본당과 보조동 건물을 하나로 연결해 스케일을 중요시하거나 웅장한 아치형 정문을 가진 보통의 교회 건축물과 달리 작은 개체가 모여서 하나를 이루는 형태로 지어져 있다.

김 건축가는 한국 현대건축에 처음으로 공간에 대한 고민을 끌어들여 곱씹어 볼 만한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박기홍 신부는 새 성전을 짓기 위해 장익 신부로부터 유명한 건축가 2명을 추천받았다. 그중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단단하면서도 따뜻하며 신비로우면서도 인간미가 풍기는’ 요구조건을 충족해줄 김 건축가에게 요청한다.

성당 내부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성당 내부에서 기도하는 신자들.

주임신부가 서울과 마산을 29차례 왕래한 끝에 김 건축가는 화해, 축제, 다원성, 환경의 조화를 의도한 성당을 완성했다. 특히 양덕성당은 1980년대 표현주의 경향을 예기한 것으로, 서구 종교건축의 영향에서 건축공간을 통한 한국 종교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종교 건축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1978년 11월 기공식을 갖고 건축에 들어갔는데 지역 건설업체가 시공을 맡아 1년 뒤 바위산에 핀 수정꽃 같은 성당의 모습을 드러냈다.

양덕성당에는 두 개의 진입로가 있다. 살짝 돌아 내려가 1층 회합실과 부속건물로 향하는 인간 영역과 2층 본당으로 오르는 신의 영역 두 곳으로 나눠진다. 오르막을 오르자 황 수필가는 “방금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신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인간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길.
인간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길.

좁다랗고 구부러진 동네 골목길을 걷듯 천천히 오르면 2층 본당에 닿는다. 본당에는 제단을 중심으로 크게 5구역으로 나눠진 신랑(신도석)과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실, 2층 성가대 자리가 있다. 공간 속의 공간의 느낌을 주어, 그다지 넓지 않지만 다양한 표정을 지녔다.

제단에는 주교좌 자리가 있는데 마산교구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이다. 교구 통할의 중심이 되는 곳이자 주교서품식, 성탄미사 등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

성당 내부 제단에 위치한 주교 문장(가운데)과 주교좌(아래).
성당 내부 제단에 위치한 주교 문장(가운데)과 주교좌(아래).

본당 아래 1층은 비정형적 평면이지만 기능적 체계를 갖춘 높낮이가 다른 교육 공간들이 들어차 있다. 신의 영역의 또 하나의 길은 본당 문을 살짝 돌아 몇 계단 내려서 뒤뜰과 사제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열린 진입로를 통해 뒤뜰에 발을 들이자 황 수필가는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안타까운 공간이라고 했다.

거친 붉은 벽돌바닥과 틈새에 번져 있는 이끼에서 지나온 시간을 유추하며 상념에 젖기도 했단다. 담장과 사제관으로 싸인 작은 뜰 나무벤치에 앉아 소박한 인간공동체에서 나오는 평안을 느끼는 곳이었는데 물이 새 콘크리트 바닥으로 보수하면서 건축 당시의 조화를 깨트려 건축미에 손상이 됐다며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성당의 대형 십자가도 새로워졌다. 지어질 당시 나무 십자가는 금속으로 바뀌었고 무념한 노출콘크리트 받침대는 붉은 색으로 칠해졌다. 소재는 변했지만 여전히 드나드는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성전 뒤뜰에는 익명의 신자가 기증한 한복 입은 성모자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성당 건물을 살피느라 오가는 중 신부님과 수녀님들과 조우했다. 반갑게 맞아주며 한 가지 당부를 했다. 건축학도나 관광객들이 종종 찾는데, 신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줬으면 한다고 했다.

지난 4월 화재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과 지붕이 무너지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안타까움이 터져 나왔다. 종교 전례를 하는 장소이기 이전에 그들 마음의 안식처였기 때문이 아닐까.

양덕성당 역시 40년 세월 동안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고된 노동자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고, 가족과 형제들이 하나될 수 있도록 신심을 살찌우게 했다. 고단한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온 그곳은 오늘도 안온한 정서와 가늠할 수 없을 사랑이 싹트고 있다.

글=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 정민주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