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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정치권부터 불매(不買)하자- 이종훈(정치부장)

기사입력 : 2019-08-13 20:17:42

‘21대 0’이라는 스코어가 있다. 축구시합이라면 대학생과 초등학생 간의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점수이다. 기량 차이가 현격한 국가대표 간의 A매치 시합에서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점수는 축구시합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기초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숫자이다.

일본은 2018년까지 2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 중 물리학상이 9명, 화학상 7명, 생리학의학상 5명이다. 반면 한국은 기초과학분야 수상자가 한 명도 없다.

매년 10월초만 되면 국내 과학기술계는 탄식을 내뱉는다고 한다. 아직 단 한 명도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해서다. 게다가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가늠도 안된다. 취업난 심화에다 병역특례 축소 움직임 등으로 이공계 인재 양성의 기반이 모래성처럼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통계자료를 보면 국내 4년제 대학의 절반가량이 단 한 개의 기초과학 학과도 운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2018학년도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이 동시에 미달됐고 KAIST 등 4개 특성화대도 처음으로 수학·물리 등 4개 기초과학 전공에서 지원자가 감소했다. 오히려 우수 인재의 의대 집중 현상은 심화되면서 과학기술 미래가 더 암울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이 세 가지 반도체 핵심 품목에 대해 수출 규제를 한데 이어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하면서 한일 간 경제전쟁이 전면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치권은 한심한 ‘친일파’ 논쟁만 벌이고 있어 한여름 불볕더위에 지친 국민들의 불쾌지수를 더 높이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힘을 합쳐 기초과학과 소재부품 지원 육성을 위한 법제도를 정비하는 등 총력전에 나서도 모자랄 판인데 여전히 편가르기에 정쟁만 벌이고 있으니 정치권부터 불매(不買)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사태를 악용하는 정치인들을 내년 총선에서 심판하자는 ‘정치권 불매론’이 거세지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당파싸움만 벌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인데 대한민국 정치판을 보면 이번 경제전쟁에서 일본에 또 어떤 치욕을 당할지 걱정이 앞선다.

아베가 수출 규제 도발에 나선 배경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기술약진에 대응해 일본을 추월하기 전에 싹을 자른다는 ‘신정한론’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무서운 것은 적어도 30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고, 일본 기업 다수가 찬동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처사는 얄밉고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코앞에 위기는 닥쳤고,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국민들의 정치불신이 더 깊어질지 우려스럽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더 거세지고 있지만 세계 1위라고 자부했던 반도체의 소재 국산화 비율이 50.3%에 불과한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실력을 길러 때를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지혜가 절실하다. 감정을 앞세운 무작정 ‘노 재팬’보다는 ‘노 아베’에 초점을 맞추는 성숙한 대응도 필요하다. 기다린다고 위기 때마다 발휘해 온 한국인의 정신(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지고 다져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정치권은 제발 국민들의 반걸음만이라도 따라 왔으면 좋겠다. ‘총선 불매(不買)’ 당하기 전에 말이다.

이종훈(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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