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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⑪ 호국의 성지 창녕군

청년 결사단 23인, 이 다리서 맨주먹으로 총검 맞섰다

기사입력 : 2019-08-13 20:49:12

창녕군은 많은 충신과 대학자를 배출한 고장이다. 창녕 사람은 예로부터 의와 예를 숭상하는 기질이 강해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뿐 아니라 항일 유림운동, 3·1독립만세운동 때 영산의 23인 결사단 등 많은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이 이 땅에서 고국을 지키고자 목숨 바쳐 투쟁했다. 호국의 성지 창녕군을 찾았다.

창녕의 독립운동은 주도한 23인 결사단이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운 창녕군 영산면 만년교./성승건 기자/
창녕의 독립운동은 주도한 23인 결사단이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운 창녕군 영산면 만년교./성승건 기자/

‘“우리의 독립투쟁은 지금부터 시작한다. 덤비면 죽인다”고 외치면서 이들을 잡아 미나리 강에 쳐넣었다. 이 소동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 순간에 주동 인물들은 품에 숨겨 온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드디어 300~400명(일 군경 기록에는 300명)의 군중들이 모여 합세하게 되었다. 주동 인물들은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징과 북을 울리며 다음과 같은 소년행진가를 부르면서 충천하는 기세로 영산읍내로 시위해 들어갔다.’

100년 전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창녕군 영산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23인 결사단이 만년교에서 일경과 맞서 싸운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는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역사다. 이 청년들은 “무쇠팔뚝 돌주먹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나라에”라 노래하며 읍내로 시위를 이어갔다.

1919년 3월 13일 오후 2시 영산 남산(남산봉). 23인 결사대는 이 자리에서 ‘결사단원맹세서’에 각자 서명 날인했다. ‘금일 오등(吾等)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 주권국을 전취(戰取)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 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서명 날인함.’ 남산서 내려온 청년들이 이 만년교에서 일경과 격전을 벌인 것이다.

애초 이들 계획은 남산에서 개춘회(開春會)라는 명목으로 주석(酒席)을 베풀어 놀며 많은 사람을 모아 운동의 대중화를 기해 의거하려는 것이었다. 영산읍에는 앞서 3월 초 서울에서부터 3·1운동 소식이 속속 전해지며, 지역에서 천도교인 구중회와 장진수, 김추은 등을 중심으로 일찍이 독립의거를 위한 준비가 됐다. 거사일을 13일로 정한 뒤 전날 밤 이들 청년들이 밀회를 가졌는데 그 소식이 일경에 흘러 들어갔다. 때문에 영산주재소 등 일제 경찰들이 남산 밑 만년교 부근에 대기하며 이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청년들이 남산에서 내려오자 일경들이 이들을 저지하고 나서면서 육박전이 일었다. 청년들은 일경들의 총과 칼을 빼앗아 미나리 밭에 던졌다. 많은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를 외치며 일경의 저지선을 뚫고 영산읍내로 진격해 시위를 펼쳤다. 군중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또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읍내를 누비며 행진하다 해가 저물어 항구한 투쟁을 약속하고 자진 해산했다.

그런데 이 틈에 일경들이 들이닥치면서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이 먼저 체포되어 창녕경찰서에 구금된다. 결사대원들은 일단 피신해 ‘창녕경찰서로 달려가 이를 습격하여 구속된 동지를 구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다같이 입옥(入獄)한다’는 결심을 하고 이날 오후 8시 다시 남산봉에 모여 군중을 이뤄 창녕읍으로 향했다.

결사단이 창녕으로 몰려가는 도중 계성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일경과 다시 마주치면서 맨주먹으로 총검에 맞서 싸우며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다 결사대원들은 작전을 바꾸어 산마루로 후퇴해 일제히 돌을 던지며 이들에 대항해 투석전도 벌였다. 끝내 일경은 도망쳤다. 이들은 2대로 나눠 1대는 화왕산 밑을 거쳐 남창교로 들어가기로 하고, 다른 1대는 창락 밑과 오리정을 거쳐 북창교로 들어가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장날을 기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한다.

거사 이튿날인 3월 14일 결사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결사단은 또 창녕경찰서로 돌입해 동지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사대 전원은 검거된다. 구속된 결사대원 23명은 대구형무소에서 이틀 수감된 후 마산형무소로 옮겨져 그곳 법원에서 각각 징역 6월이나 8월, 또는 징역 10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결사단의 의거는 창녕군의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영산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학생운동과 창녕군 남지에서 3월 18일 남지리 시장 만세운동 등이 분연히 일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일경과 맞서 싸운 만년교는 세월이 흘러 일부 보수가 되긴 했지만 견고하게 자리하며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청년들이 결의를 다진 남산 일원은 남산호국공원으로 명명됐다. 청년들이 남산 독립운동을 결의한 자리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된 영산의 ‘3·1운동독립기념비’와 ‘3·1봉화대’가 세워져 있다. ‘구중회·김추은·장진수·하은호·박도문·임창수·박중훈·이기석·장정수·김두영·구남회·하영규·남용희·이수철·구판진·구판돈·서점수·김찬선·신암우·김금영·최봉용·권재수·조삼준’, 기념비석 하단에 새겨진 결사대원 23명의 이름이다.

남산 독립운동을 결의한 자리에 세워진 3.1독립운동기념비./성승건 기자/
남산 독립운동을 결의한 자리에 세워진 3.1독립운동기념비./성승건 기자/

결사대원의 후손과 군민들은 매년 3월 1일이면 이곳에서 위령제를 올린다. 또 결사대가 100년 전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 매년 열리는 영산 3·1민속문화제 행사 기간 중에 횃불을 올려 애국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결사대원들은 독립운동을 할 당시 나이가 17세부터 28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수감생활을 한 결사대원들은 고초를 겪었다.

이 탓에 몸이 성치 않아 젊은 나이로 사망한 이도 있고, 멀리 일본이나 중국, 연해주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겠다며 떠난 이도 있었다. 또 결사대 중에 조국에서 생전 청년운동과 소년운동, 농민운동 등을 계속한 이도 있었다. 이들의 독립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오롯이 이어가고 있다.

결사단원 중 한 명인 권재수 선생의 손자 권정오 (사)영산3·1운동독립결사대 유족회장은 “전국적으로 결사대 유족들이 다 흩어져 있는데 연락이 닿지 않거나 후손이 끊어진 경우도 늘고 있다.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후손을 백방으로 찾는 등 노력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받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권 유족회장은 “결사단이 만세운동을 결의한 남산은 호국의 성지로 자리를 잡았다. 후손들은 기념비 앞에서 매년 위령제를 올리는데, 후손으로서 이 자리에 더 위상에 걸맞은 위령탑이 언젠가 건립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높이고 더 예우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김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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