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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원래 만드는 것이다- 홍병진(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경남지역본부장)

기사입력 : 2019-08-18 20:19:32

IMF 경제위기 발생 직전, 행정학 전공인 필자는 뜻밖에 공학전공자들만 있는 신제품개발실 발령을 받았다. 이유는 “자네가 공학 전공자들의 말귀를 제일 잘 알아들을 것 같아서”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진공은 중소기업의 제품개발 역량을 혁신하기 위해 미국에서 최첨단 3차원 설계 장비와 S/W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무렵 엄청난 흥행을 했던 영화 ‘쥐라기 공원’의 CG작업에 동원됐던 장비와 소형 트럭만한 3차원 측정기, 그리고 당시만 해도 아주 생소한 3D 프린터도 2대가 포함됐다. 이들은 당시 15~30일 정도 걸리던 시제품 모형제작을 불과 3~4일로 단축한 획기적인 장비였다. 그때는 국내 초일류 대기업 두 곳에서만 있던 장비였다.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었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소식을 들은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는 일본 수출품 개발을 위해 울산에서 2~3일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고 1년 동안 찾아온 사장도 있었다.

사업이 활발해질수록 지속적인 예산 조달이 급선무였다. 미국에서 들여온 낯선 영문 과학기술잡지와 장비 매뉴얼을 빠른 시일 내에 읽으며 엔지니어들 옆에 붙어서 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엔지니어들의 말을 이해하는데 2년이나 걸렸다. 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예산담당 공무원들을 설득하고 국회의원 보좌관들을 찾아 지지를 얻어야 했다. 예산 담당 사무관은 “설명하신 내용은 솔직히 공학과 기술 쪽이라 용어조차도 이해하는 건 어렵지만, 담당자분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니 승인을 해 줘도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요구예산을 삭감없이 승인해 주었다. 칼자루를 쥔 문과 출신들을 이해시키는 데 많은 좌절을 맛보았던 엔지니어들은 너무도 좋아했다. 덕분에 우리는 충분한 장비와 오퍼레이터를 확보하는 한편 국내 제품개발시장 전문기업의 DB를 구축하는 데 매진할 수 있었다.

IMF 외환 위기가 발생하자 경쟁력 높은 제품 아이디어를 가진 중소기업들에게는 기회였다. 우리의 지원을 받아 제품화에 성공한 중소기업은 미국시장 진출 2년 만에 1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우수한 제품을 모아 매년 작은 전시회를 열었고,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 기업들도 나오면서 주요 언론사의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문전성시(?)를 이루자 어느 날 이사께서 이벤트 행사 확대를 지시했다. 나는 이사님께 “과학이나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내는 이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벤트 행사는 보는 사람들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밤낮없이 개발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사업의 겉멋만 포장하는 나쁜 결과가 많아 중소기업들에게 해가 된다고 설명을 드리자 이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사업은 나중에 ‘청년창업사관학교’의 모티브가 됐다.

요즘 일본의 무역도발로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R&D 예산을 투자하는 나라이다. 어디에서 누군가는 이미 기술을 개발하고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만 시장규모나 수익성 같은 플랫폼이 부족해 기술이 사장되어 있는 경우가 우려된다. 정부와 대기업이 협력해 소재부품 중소기업에게 적정한 규모로 시장을 제공하고 제품화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플랫폼 구축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길을 찾을 것이고, 또 길을 만들 것이다.

홍병진(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경남지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