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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숲속의 아침을 기다리는 편지- 김정숙(시인)

기사입력 : 2019-08-22 20:21:37

마음에 태풍이 불었다. 잔뜩 구름이 피고 바람이 일더니 끝내 가눌 수 없는 폭우가 마음을 때리고 있었다. 8월의 어느 날 바다처럼 신열을 달래며 울렁거리고 날뛰고 뒹굴어야 했다. 내가 아팠던 그해 그날들. 바람도 부드러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내 얼굴은 이미 아로니아 색깔로 까맣게 익어 있었다. 사막의 가시 돋친 선인장이 건드리면 찌를 준비가 되어 있듯이 나는 명아주 부지깽이처럼 딱딱해져서 불에 넣어도 타지 않을 만큼 독해지고 있었다. 한 번쯤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무너지지 않으려고 냉정해지고 강해지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무진장 뜨겁던 그해 여름에 내게 초청하지 않은 병이 찾아와 나는 암 환자들과 함께 투병생활을 했다. 그들은 항암치료를 거듭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이웃이 되어 환하게 웃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서로의 경험담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무거운 삶을 사랑의 노래로 만들고 있었다. 악몽으로 헛소리를 하고 온통 병실 환자들에게 수면방해가 될 만큼 내가 불안해할 때 환우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내려두고 나를 위로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에 애착을 접고 그냥 아무것도 생각지 말라 하며 그때 어느 환우가 불러주는 노래가 내 마음을 다독다독 재웠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아메리카 인디언의 노래다)

그 순간 내게 숲속의 싱그러운 아침이 보였다. 새들이 재잘거리고 모두가 깨어나고 눈부시다. 빈 하늘에 조용한 별들이 숨어서 나를 지키고 어둠의 불안은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때 동화 속의 어린왕자가 던지는 말을 되새겨본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지금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은 가시는 거니까.-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중에서-

삭막한 사막을 걸어갈 때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희망은 한없이 위대한 힘이 된다. 고단함을 풀어주는 아름다움은 눈으로 찾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도 영원불변한 것도 없겠지만 치료를 끝내고 퇴원할 때 환우들의 미소와 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분들도 지금 나처럼 건강하게 살고 있겠지. 그들이 나의 마음을 잡아주었고 나는 투병생활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올해도 남편이 정년 후에 일구어 놓은 아로니아 농장을 오가며 여름을 보냈다. 거제 바닷가 편백숲 향을 받으며 해풍을 머금은 열매처럼 나도 탱글탱글 여물어간다. 발밑에 벌레들이 넓은 입체공간을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도 기특하다. 질경이 또한 억센 풀과 경쟁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순하게 살고 있다. 그들도 외로운 밤이면 별을 보고 이별을 예측하기도 하겠지. 이슬 젖은 잡초야. 내가 뽑아야 할 것은 잡초가 아니라 마음의 욕심이란다.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언제 커서 나의 별을 삼킬지 모르니까. 숲속의 싱그러운 아침에 나는 나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새들처럼 날마다 아침을 맞이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오늘은 골짝바람이 여름을 타작한다.

김정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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