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촉석루] 엄마와 노모- 강양희(KT 창원지사장)

기사입력 : 2019-08-25 20:21:46

나의 엄마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불교신자다. 유년 시절 엄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쓸쓸함이다.

엄마가 절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가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나서였다. 엄마는 절에 내내 있다 저녁이 훌쩍 넘어 피곤에 지쳐 오셔서, 나와 동생들은 엄마와 학교생활이나 친구얘기, 사춘기의 투정 이런 것 없이 순전히 우리끼리만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는 항상 너희들 앞날과 아버지를 위해서 이런 거다고 말했지만 정작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냥 언제나 볼 수 있는 엄마였고, 집안의 가세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집안이 이렇게 어려운데 종교에만 매달리는 것이 너무나 유약하고 가정을 방치하는 것 같아, 차라리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따지기도 하며 종교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키웠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떨까.

노모는 무릎관절 수술 후 다리를 절며 매일같이 절에 다니시고 우리가 주는 용돈을 모조리 시주한다. 형제들 간에 용돈을 끊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전히 우리 가족은 엄마와 갈등 중이다.

내가 장성하고 애를 낳고, 4월 초파일 즈음 어느날 엄마를 뵈러 절에 찾아갔다.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는 엄마의 허연 백발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엄이 느껴졌다. 엄마는 8시간 이상 부처님 앞에서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이것이 30여년 매일의 일상이었다. 종교라는 아우라 속에서 절대적인 무엇을 인지하며, 두려움으로 세상에 해가 되는 행동을 삼가는 경외감과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생각으로 겸손을 체득한 우리 엄마가 거기 계셨다. “딸아, 복은 지어야 한다. 복은 명랑하고 친절한 사람에게 온다. 명랑하려면 얼굴 표정을 밝게 하고, 특히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친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수천 개의 초파일 등불이 경외와 겸손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후 나는 노모를 보살님으로 부른다. 가끔은 다시 돌아간다면 어린 시절 옆에서 절대적인 내 편이 되는 엄마가 그립다.

강양희(KT 창원지사장)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