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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⑫ 치열한 만세운동 전개된 고성

거리 곳곳 울려퍼진 독립 함성 총칼도 막지 못했다

기사입력 : 2019-09-10 20:50:07

기미년 3월부터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만세운동. 고성에서도 어느 곳 못지않게 거세게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고성에서는 100년 전 그해 3월 20일부터 수차례나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성내는 물론이고 상리, 회화, 대가, 영오까지 만세운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1971년 세워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성승건 기자/
1971년 세워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성승건 기자/

◇3월 17일= 비록 사전에 발각되긴 했지만 고성의 첫 독립만세운동 거사일은 3월 17일이었다.후에 의열단에 가입한 이주현(진주)이 1919년 3월 15일 밤 고성읍 선동리 박진택의 집을 찾았다. 배만두, 이상은, 김상욱 등을 초청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고성읍내 만세운동을 의논했다.

배만두는 학생, 이상은이 기독교인, 김상욱은 농민을 동원키로 하고, 17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거수가 후학 양성을 위하 사재를 털어 설립한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 헌병이 거사일 새벽에 배만두의 집을 급습하고 배만두를 끌고가면서 첫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국천에서 배둔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구만면에서는 만세운동을 서둘렀다. 고종황제 인산(장례식)에 갔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최낙종과 최정철은 고성으로 돌아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최정원 등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났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필사해 12개 동리에 비밀리에 전했다. 드디어 3월 20일 오후 1시. 구만면에서 나팔소리가 울렸다. 신호였다. 개천리와 마암리에서도 강변 모래사장인 국천사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군중들은 그대로 회화면 배둔리장터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배둔시장은 고성 동북지역 7개 면은 물론이고 창원과 함안과도 인접해 장날에 많은 장꾼과 민초들이 모이는 곳이다. 만세행렬이 배둔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일제가 막아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배둔리시장에서는 이미 연락을 받은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 등이 군중과 더불어 태극기를 들고 마중을 나왔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수백명이 운집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고성군과 주민들은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1년 3·1운동 창의탑을 세웠고, 2008년부터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1971년 세워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성승건 기자/
객사마당에 세워진 만세운동 표지석./성승건 기자/

◇고성읍 만세운동= 고성의 첫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동경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성읍에 와 있던 안태원은 귀향 중인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 서주조와 협의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드디어 3월 22일 정오 이들을 주축으로 학생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고성읍의 첫 만세운동을 펼쳤다. 경찰의 탄압과 주동 인물들의 검거로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이 나선 독립만세운동은 민중들을 크게 흔들었다.

민중들은 4월 1일 읍내 장날에 다시 한 번 일어섰다. 천도교도와 읍내 노동자 등 60여명이 쌀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들어가자 김진만과 문상범 등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어시장을 돌면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수백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고성 헌병분견소만으로는 역부족으로 판단해 사천 일본군 헌병분견대와 고성 일본 재향군인까지 가세해 총검으로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때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객사마당’에는 현재 고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들어서 있다. 고성문화원은 이를 기려 건물 앞에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표지석을 세웠다.

1971년 세워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성승건 기자/
배둔리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행진하는 모습./고성군//성승건 기자/

◇만세운동의 물결= 4월에도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대가면 송계리 이진동이 주동이 돼 기미년 4월 2일 송계리 사립강습소에서 나팔을 신호로 수백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제는 총검으로 시위대를 탄압해 해산시켰다. 앞서 3월 28일에도 상리면 오산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펼쳐졌고, 4월 3일에는 영오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지는 등 고성에서는 각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독립만세의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3·1만세운동 이후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선우협 등 애국지사 등이 기거했던 곳이 개천면 연화봉 중턱 옥천사다.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 등은 이들과 함께 옥천사에서 1921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일제의 의해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기억하자= 3·1운동 창의탑도 세워졌지만 고성에서는 독립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도 진행해왔다. ‘이달의 인물’에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선정해 널리 알려왔다.

고성문화원은 2017년에 고성군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장소와 독립운동가 생가 등에 표지석을 설치하는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배둔리만세운동이 시발점이었던 국천사장(구만면 국천다리)을 비롯해 고성의 첫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객사마당터(현 고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송광의숙(대가면 옛 송계초등학교) 등이다. 독립운동가와 관련해서는 백인영(영오면 금산리), 허재기(구만면), 심재인(대가면 평동), 최정원(구만면 화산), 최낙종(구만면 당산), 정덕수(개천면 좌연리 월곡) 관련 장소에도 표지석을 설치했다.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객사마당’터.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객사마당’터.

올해에는 고성 향토사학자 조현식 선생이 펴낸 ‘고성의 독립운동사’에 더해 각종 사료를 활용해 ‘고성독립운동사’가 개정증보판으로 발행됐다. 고성문화원의 고성군 예산을 지원받아 발간했으며, 3·1운동 배경과 경남 각지의 독립만세운동이 담겼다. 고성지역 만세운동을 상세히 기술했고, 고성에서 일어났던 지세인상 반대운동, 어부 동맹파업,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과 항일투사의 개인약전이 실렸다.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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