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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못난 부모’ 단상(斷想)- 이상권(정치부 서울본부장)

기사입력 : 2019-09-16 20:28:16

다 못난 부모 탓이다. 일류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다. 벌이도 시원찮다. 대물림할 건 가난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도 어둡다. 학종이니 수시니 정시니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입시제도엔 까막눈이다. 그저 자식에게 죽기 살기로 공부해 아비처럼 살지 말라는 신파조 가락만 읊조린다. 밤잠 설치며 죽어라 공부하면 좋은 대학도 가고 입신양명한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사고에 갇혔다.

‘할아버지 재력, 엄마 정보력, 아빠 무관심’ 이 세 박자가 자식을 명문대 보내고 성공시키는 현대판 키워드란다. 재력과 정보력은 없고 무관심으로 무장한 부모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나.

한데 별천지를 봤다. 같은 하늘 아래 딴 세상이 있더라. 유명 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까지 필기시험 없이 다양한 스펙만으로 입학 가능한 게 실화란다. 불법이냐 아니냐 시비가 있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코피 쏟으며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앉아 책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근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입 장벽은 높고도 탄탄하다. 한마디로 ‘잘난 부모’라야 가능하다. 재력은 기본이고 최고 대학을 나와 교수 정도는 해야 엄두를 낸다. 그들만의 리그는 곧 이익 네트워크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자녀를 하층민이 근접하기 힘든 ‘황금 스펙’으로 완전무장시킨다. 사회적 지위와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팔방미인’의 화려한 이력으로 치장한다.

누가 장관을 하든 뭘 하든 서민에겐 언감생심 먼 나라 얘기다. 문제는 공정의 역린을 건드린 부분이다. 가진 것 없는 이에게 불공정은 분노를 부른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느냐가 본인은 물론 자식의 인생까지 결정하는 시대로 회귀했다. 계층 간 사다리가 다르고, 인생의 출발선이 차이 나는 현실이다. 기득권 카르텔과 일반 계급이 나뉘는 사회 구조다. 이들의 반대편엔 스펙을 만들 여건조차 안 되는 마이너리그의 분노와 좌절이 웅크리고 있다. 박탈감을 느낄 기회조차 박탈당한 다수의 절망이다. 자식이 ‘하류인생’으로 살기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절망밖에 물려 줄 것 없는 무능한 부모는 가슴이 문드러진다.

특혜받는 소수는 주도면밀하다. 최근 나라를 혼돈에 빠뜨린 당사자도 “불법이 없으니 문제 될 것도 없다”고 강변한다. 대통령까지 나서 잘못이 없다고 하니 이만한 보증이 또 어디 있겠나.

의혹 당사자가 스스로 인정한 ‘금수저’ 집안은 우리 사회 특권층이 얼마나 영민하게 움직이는지 보여줬다. 합법이란 방호벽 안에서 그들의 세계는 공고히 대물림된다. 툭하면 바뀌는 대학 입시 제도며 각종 자격시험 조건이 이들 부류의 입맛에 맞춘 시스템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 ‘비밀통로’를 알아챈 특권층만이 그 열매를 거머쥘 수 있다. 법도 시스템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부모는 애먼 자식만 닦달하는 업보를 짓고 있다.

대통령은 이번 추석 인사에서 특히 공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공정한 사회가 서로에게 믿음을 준다”고 했다. 젊은이 손에 분노의 촛불을 들게 한 불공정 시비를 의식한 대목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국민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던 문 대통령의 명취임사다. 지난 정권의 무능함에 실망했던 민초에겐 가슴 벅찬 기대였다. 근데 이쯤에서 그 발언의 유통기간이 지났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어째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고, 무엇이 정의인지 헷갈리는 나라로 가는 분위기다.

이상권(정치부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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